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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시()에 대한 일말(一抹)의 추론

인공지능도 시()를 쓸 수 있을까?”

 

   

   

 

  내가 당신에게 인공지능도 시()를 쓸 수 있을까?” 묻는다고 가정하자. 황당하다면 황당할 수 있는 이 질문에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아니요!”라고 단순하게? 그렇다면 그 아니요!”의 근거는 무엇인가? 강력한 반대 근거를 제시하는(앞으로 조목조목 제시할 것이다) 논리에 반박할 논거(論據)를 가지고 있는가? 어쩌면 당신은 거꾸로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는 근거를 나에게 보여 주시오!”라고. 이 같은 질문을 답변으로 던지는 것은 당신이 나에게 교묘한 굴복을 했다는 의미다. 나는 그 근거를 댈 수 없으니,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근거로 자신을 설득해 달라는 논리이다. 나는 단호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미래를 상상하라. 백 년 전 까지만 해도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것들이 과학 기술의 진보(進步)에 따라 미래라는 이름으로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의심하는 그것, 인공지능이 시를 쓰는 시대가 멀지 않아 도래할 것이다.”라고. 당신은 나의 추론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시를 쓰는 사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시인(詩人)이다. ‘흔히는 표현을 쓴 까닭은, 그만큼시인이 많기 때문이다. 자칭 타칭, 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시와 관련된 단체, 예를 들어 작가회의나 문인협회, 시인협회, 그리고 수많은 사설 단체들의 숫자를 다 합하면 몇 만 명은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떼거지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만약 인공지능이 놀라운 능력의 시를 쓰기 시작하면, 숫자는 무의미에 불과하다.

  나의 논리는 강력한 반발에 부닥칠 것을 직감한다. 근대 신문에 실린 찰스 다윈의 삽화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이 문제는 시인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특히 전업시인들의 경우)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자존심의 문제가 더 크다. 타 문학에 비해, 예를 들어 소설가, 수필가, 극작가라고 불리는 것에 비해 시인은 ()이라고 불린다. 자존심 하나로 지켜온 세월이 얼마인가. 시인(詩人)이라는 자존심마저 무너진다면 시인이 시를 쓸 아무런 근거도, 명분도 사라지게 된다. 시는 소멸할 것이고, 박제되어 박물관에 전시되는 인간의 여러 고전(古傳) 중 한편으로 남을 것이다.

   

1. 인공지능(人工知能)의 원리

   

  물화(物化)된 인간 지능의 상징, 인공지능은 얼마나 발전을 했을까? 지금 현재의 기술 발전 수준을 논하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진보하고 있고, 멀지 않아 엄청난 미래에 도달할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사용 중인) 기술은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과거의 기술이다. 실용화라는 단어가 가진 언어의 상징성은 과거라는 직접적 증거다.

  세계의 석학들이 인공지능 무기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실린 기사나 체스 세계 챔피언이 인공지능과의 경기에서 패배한 것이나, 경제와 스포츠 기사를 쓰는 인공지능이 등장했다는 기사는 더는 놀랄만한 사건이 아니다. 인공지능은 물체를 인식하는 것을 거의 완벽히 해결했을 뿐더러, 구글(Google)이라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여 다양한 자료를 취합·재생산할 수 있는 상태, 논리적으로서의 인간의 능력을 손바닥 뒤집듯 손쉽게 뛰어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 시인으로서 기술의 위험한 도발에 직면하게 된다.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는가?’에 대한 추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선 먼저, 인공지능 구조(system)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인공지능에 완벽한 알고리즘(algorithm)을 가지고 있다면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알고리즘은 다음과 같다.

   

1. 입력 : 외부에서 제공되는 자료가 있을 수 있다.

2. 출력 : 적어도 한 가지 결과가 생긴다.

3. 명백성 : 각 명령들은 명백해야 한다.

4. 유한성 : 알고리즘의 명령대로 수행하면 한정된 단계를 처리한 후에 종료된다.

5. 효과성 : 모든 명령들은 명백하고 실행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알고리즘을 아는 것은 인공지능 진행방식을 아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알고리즘이 인공지능 전체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알고리즘이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명확히 정의된 명령의 집합이며, 한정된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알고리즘의 관점으로 시를 제작한다고 가정을 하자. 먼저 입력, 방대한 문장의 데이터가 구글이나 네이버를 통해 제공될 수 있다. 두 번째로 출력, 입력이 가능하면 출력도 가능하다. 세 번째로 명백성, 특정한 상징과 비유를 가지는 문장을 완성한다는 문학 기술(이제 문학도 하나의 기술로 볼 수 있다)의 명백성이 존재한다. 네 번째로 유한성, 알고리즘의 명령대로 수행될 것이며, 인공지능은 어떤 인간보다 성실히 이 작업을 마칠 것이다. 다섯 번째로 효과성, 인공지능은 알고리즘에 따라 명령 자체를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인간이 쓰는 시보다 더 뛰어난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할지 아직장담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알고리즘의 개념(다섯 가지 수행과정)’으로 추론할 때 인공지능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근접할 것이다. 인간의 뇌도 알고리즘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시를 쓰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언어는 01로 만들어져 있다. 0이 참이라고 한다면 1은 거짓이다. 참과 거짓을 무한 반복하면 어떤 논리값이 만들어진다. 인공지능 개발이 어려웠던 이유는 참과 거짓 사이(01이 아닌,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에 애매모호한 (정의할 수 없는)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탁구공과 골프공을 비교했을 때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개의 공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골프공을 탁구공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탁구공을 골프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선택은 참과 거짓의 명제를 벗어난 선택이다. 인간의 선택은 주변 상황에 따라 옳을 수도 있으며,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 컴퓨터는 선택의 오류가 없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항상 옳은 답만을 구한다. 만약 틀린 답을 구할지라도 그것은 개념적으로 옳은 답이다.

  이 문제에 대안은 존재한다. 인간의 시각적 기능을 대입하여 명백하지 않는 것은 무작위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난수(亂數)를 사용하듯. 물론 여기에 인위적이라는 문제와 함께 인간의 자유 선택과 다른, 앞서 말한 틀린 것을 구한 값도 개념적으로 옳은 답이라는 변증법적인 문제에 도달한다.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를 통해 인간의 의지란 기계와 다르게 순수하며, 언제나 자유의지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고 역설적으로 두둔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로서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존재할까?’라는 궁극적인 의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2. 인간은 생체 지능 컴퓨터

   

  인간의 행동 패턴을 조금만 유심히 관찰하면, 창의적인 행동보다 반복적이고 유사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알람시계처럼 같은 시간에 깨고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출근하며, 컴퓨터와 한 몸이 돼서 일하고, 점심을 먹고, 다시 일하고 퇴근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대부분의 활동(큰 행동 패턴으로 봐서)이 이와 같다. 주말이면 이 범주를 벗어나지만, 일주일이라는 시간 패턴으로 보면 한 주일은 지난 주일의 패턴과 비슷하다. 그리고 지난해와 올해의 행동패턴이 유사하고, 모든 사람의 생체주기는 유사하다. 어찌 보면 인간의 두뇌가 아닌 인공지능보다 낮은 기능의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행위의기능만 가지고 있어도 인간과 같은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외모 구별에 문제만 없다면 우리는 인간형 안드로이드 로봇을 오랜 시간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인간인지 아닌지 구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의 추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이 인공지능 컴퓨터와 유사한 개념인 생체 지능 컴퓨터으로 작동한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이것은 문학적 접근방식 아니다. ‘인공지능 컴퓨터는 문학적인 텍스트로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낡은 개념이다. 인공지능 컴퓨터를 파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진보적인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체 지능 컴퓨터라면, 인공지능 컴퓨터도 시를 쓸 수 있다! 일종의 귀납적 추론이다.

  컴퓨터로서의 인간이라는 생체 컴퓨터(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와 기계적 기능의 인공지능 컴퓨터가 다른 것은 그 에너지원을 무엇으로 하고 있느냐가 전부다. 인간이라는 생체 컴퓨터는 인간이 섭취하는 다양한 영양소에서 추출하는 전기에너지이고, 인공지능 컴퓨터는 석유나, 가스, 원자력으로 생산된전기에너지다. 결국, 전기를 얻는 방식이 다를 뿐 우리의 뇌나 컴퓨터의 CPU는 모두 전기에너지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

  논리 연산도 유사하다. 인간은 극단(極端)을 선호한다. 컴퓨터가 01로 연산을 하듯이. 인간에게 있어 논리의 접근 방식은 보통 두 가지이다. 칸트가 ‘3대 비판서에서 말한 선과 악, 옳음과 거짓, 미와 추, 친구와 적 등의 개념은 결국 나에게 유리한가, 그렇지 아니한가의 개념이다. 나에게 유리한 것을 1로 놓으면, 나에게 불리한 것은 0이다. 10의 계산으로 인간 행동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때론 용기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논리를 거부한다. 때때로 나에게 불리해도 0을 선택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성이라고 부르는데, 인문학자는 분명 이성이 인간이 컴퓨터와 가장 다른 요소임을 강조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까지 연산할 방법은 없을까? 우리 스스로가 이성이라는 철학적 허구에 빠져 있지 않은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인류멸망보고서라는 영화를 기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영화에는 하나의 로봇이 등장한다. 부처의 현신과도 같은 논리를 가진 안드로이드 로봇. 사원의 수행자들은 그 안드로이드를 하나의 불성(佛性)을 가진 존재로 인정한다. 하지만 안드로이드를 만든 회사는 안드로이드의 행위를 시스템 오류라고 평가 절하한다. 수행자들은 안드로이드를 지키려고 하지만 회사의 강력한 반발과 안드로이드 자신의 결정에 따라 폐기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로봇이 불성(佛性)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어쩌면 로봇이 시를 쓸 수 있는가보다 쉬운 문제다. 철학은 철학으로서의 존재자가 아니다. 철학은 개체다. 철학은 희랍시대에 확립된 이후 변증법적인 추구를 목표로 한다.

  거칠게 말하면 철학은 하나의 연산행위다. 철학적 논리에서도 컴퓨터는 01의 숫자를 고르면 된다. 컴퓨터는 지금 까지 수많은 인간이 개념화 시킨 철학적 데이터를 이용해 인간이 말하는 개념의 옳고 그름을 심판할 수 있다.

  만약 로봇이 종교적 데이터에 철저히 따르고, 그 종교적 데이터에 따라 절대자의 폭력에 항거하며 민중의 편에서 스스로(알고리즘화 된 스스로의) 전원을 차단한다면 그 로봇은 그 어떤 종교에서나 인간의 이성적 가치를 초월한 성자(聖者)가 될 수 있다.

 

  

3. 인공지능은 어떻게 시를 쓰는가?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살펴봐도 시를 쓰는 사람은 소수다. 시는 문학 장르 중 가장 어렵고 접근하기 난해한 장르다. 시는 단순히 문장의 재배치나 비트겐슈타인 방식으로 말하는 철학적 언어의 놀이가 아닌 언어의 순수성에 입각한 상징과 비유의 문학이다. 언어의 순수성은 논리적 문장과 비논리적 문장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게 한다. 논리적 문장은 문장의 문법에 충실하지만, 비논리적 문장은 문장이 전통의 문법적 구성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시는 비문(非文)이며 무문(無文)이기도 하다. 문장이면서 문장이 아니기도 한 것이다.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지식인의 특권은 아니지만, 한국어를 안다고 해서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도, 문장의 독해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시인(詩人)이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읽어내지 못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자신만의 길()을 가진 시인에게는 고유한 문법이 있기 때문이다.

  시()라는 문학 장르로의 합류를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찾으면, 인공지능은 시를 쓰지 못한다는 이상적인(고귀한 플라톤의 철학처럼) 추론에 이른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작은 피난처에 불과하다. 노아의 방주라는 특별한 해결책을 찾은 것도 아니다. 타조처럼 작은 구덩이에 머리를 박고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있는 형상이다. 자신의 엉덩이 살이 붙어있는지 잘려나가는지도 모르는 채.

  인공지능이 시()의 형이상학을 극복하지 못하라는 법이 있는가? 구글(Google)의 데이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구글은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이다. 구글은 자본주의 문명의 절대 권력을 가진 신()과 같다. 방대한 데이터에는 온갖 종류(인종과 언어를 넘어서는)의 시의 데이터를 포함하며, 시를 분석한 평론, 전문적 논문을 포함한다. 만약 몇몇 악마적인 신앙을 가진 해커가 배움(STUDY)이란 특별한 알고리즘을 만들어 인공지능에 축복의 성수를 붙는다면, 인공지능은 어쩌면 인간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문법의 시를 탄생시킬 수도 있다(이런 일들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보는가?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가?).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어떻게 시의 문장을 조합할 수 있는가? 정말 인공지능이 시를 제작(製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인공지능이 처음부터 모든 시를 완벽하게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언어 번역 프로그램의 진보와 같다. 우리는 영어를 한국어로, 한국어를 영어로 바꾸는 프로그램을 인터넷에서 손쉽게 만난다. 처음 번역 프로그램을 접하게 될 때면 마법처럼 느껴지지만, 누구나 이내 실망하게 된다. 번역이 너무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번역 프로그램을 보면 기술이 진보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 멀지 않아 완벽한 직역이 가능한 프로그램이, 그리고 그 이후 직역을 넘어 의역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의 진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인식하는 번역 프로그램이다. 컴퓨터가 사람의 분위기나 기분까지 인식하면 우리는 어떤 외국인과도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언어의 국경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멸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인공지능공학자라면, 그래서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게 하는 알고리즘을 만든다고 가정하면, 인공 번역기와 같은 관점에서 출발할 것이다. 언어의 습득은 모방을 기초로 한다.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거칠게 말하면 문학은 일어날 것 같은 현실(리얼리티)을 문자로 모방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과 상황은 문자화되었다. 애니미즘을 비롯한 종교의 신비성은 물화(物化)된 계몽에 의해 사라졌으며(문자화, 데이터화 되었으며), 그 성스러운 증거는 바로 구글이다. 구글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는 이미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감정의 문장들을 이미 수집 완료했으며 지금도 수집하고 있다.

  앞서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를 참고하면, 지금 개발된 알고리즘만으로도 스포츠나 경제 뉴스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 문장 완성도는 이미 보장된 것이며, 이 문장에 비유와 상징의 코드를 가미하면, 완벽하지 않아도 어떤 특정한 시()를 닮은 문장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를 구글의 방대한 데이터에 접속하여 다른 시와 비교하는 것이다. 문장과 단어, 그리고 해석상의 비유가 적절한 것인지. 적절하지 않다면 10의 연역적 방식으로 끊임없이 단어와 문장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만으로 부족하다고 판단된다면, 과도기적인(21세기 인간과 기계의 고도의 분업화처럼) 인간의 고유한 시적 기술(technology)을 인공지능기능에 일정 부분 가미하는 것이다. 분명 이것은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인공지능이 시를 쓰는 일이 시작되는 대사건일 것이다. 마치 초벌 번역을 하듯, 일차적으로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시의 방향과 구조(뼈대)를 완성하고 시인의 고유한 방식으로 첨삭하여 시인이 원하는 방향의 시를 완성하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는 인공지능이 시를 쓰는(만드는) 기능적인 면이 아니다.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기술은 인공지능이 자의적으로 시를 쓰게 만드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진보는 다행스럽게도 주체라는 인간 영혼에 유사한 무엇을 만들지 못했다(만약 인공지능에 주체가 생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러므로 인공지능이 시를 쓰기를 원한다면, 아직까지는 시스템화된 인공지능을 조작(시를 쓰게 명령을 내리는)하는 누군가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4. ()를 포기한다는 것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인공지능이 시를 쓰기 시작한다면 직업으로서 시인의 존재가치의 가능성은 극도로 낮아진다.

  직업은 시대와 사회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러기에 직업의 필요성은 변한다. 인기 있는 직업도 순식간에 변한다. 과거 70~80년대 그렇게 많았던 버스의 안내양도, 80년대 인기를 누렸던 문서를 타자로 대신 작성하던 타이피스트도 사라졌다. 우리나라의 부흥을 일구었던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이나 전화국의 전화교환수도 그 외의 셀 수 없는 다양한 직업군이 사라졌다. 산업의 고도화는 새로운 직업의 생성과 소멸을 부추기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에겐 시인이라는 직업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대안을 선택해야 하나. 아니 대안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앞선다. 어쩌면 인공지능 발전을 막는 것이, 인공지능공학자를 테러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일까? 순수문학을 지키기 위한 극단주의 저항단체를 조직하여 폭탄을 던지고, 차량폭탄 테러를 하는.

  시인이 멸절하는 시대가 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메멘토 모리. 우리의 과거 세대가 겪었던 죽음을 기억하라.

  나치는 유대인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육체성을 가진 유대인을 뿌연 연기로 기화(氣化)시키는 홀로코스트(유대인식의)라는 놀라운 마법을 부렸다. 60년 전의 이 나라의 우울한 과거는 어떠한가? 총칼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역한 이들을 빨갱이라 몰아 학살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각 세계의 현장, IS라고 불리는 이슬람 과격단체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강간과 폭행, 학살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인간이 우리의 머나먼 미래, ()에 대해서 관대함을 가질 수 있겠는가? ()는 쌀도, 빵도 그 어떤 물질도 만들 수 없다.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 문학은 언제나 그늘로 숨어들었다. 문학의 부흥이란, 다시 말해 시의 부흥이란, 지극히 폭력적인 권력에 반하는 인본주의 운동이다.

  왜 우리가 시를 버릴 수 없는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인가? 자본주의적인 경제적인 관점에서 지극히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시의 명맥을 유지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너무나도 지극히 단순하다.

  시를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간성을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를 버리는 것과 같다. 인공지능 컴퓨터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의지를 얼마나 수혈 받을 수 있겠는가? 수혈은 수혈일 뿐이다. 수혈로 공허한 허기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혈을 받는 것은 내 피가 아니다. ‘인공적인 피다. 시를 문학을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안드로이드 로봇이 된다는 것과 동격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차라리 인간은 안드로이드 로봇이 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 증오와 분노를 삭제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욕심은 영원히 사라지고 세계는 평화를 얻을 것이다. 인간 종족은 그것으로 영원할 수 있을 것이며, 결코 멸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이 가정에 동의하는가? 당신은 평화주의자이기에 이와 같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순화(純化)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만약 인공지능기술이 발전하여 인간의 뇌에 직렬로 접속할 기술의 진보가 이뤄진다면, 파시스트는 이와 같은 폭력적인 사건을 벌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수술대에 누워 평화라고 불리는 축복의 저주를 받을 것인가?

  우리는 인본주의의 본질을 착각하면 안 된다. 평화는 인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단편적 모습에 불과하다. 평화는 인본주의의 궁극적 가치와 목표가 아니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시는 이 땅의 영원한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시의 최종목표는 평화가 아니다. 시인은 오직 평화를 위해 시를 쓰지는 않는다. 때론 시는 폭력을 선동한다. 시위를 선동하고, 사람들의 가슴에 선량한 불을 지른다. 불가능에 맞서 싸우자고, 이때 시는 평화가 아닌 피를 부르는 악덕(惡德)의 발화이다.

  

 

5. 물화(物化)된 인간과 시()의 의미

   

  과학은 진보하고 있다. 그 진보의 끝이 어디인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과학의 진보는 무엇을 위함인가? 진보의 목표는 인간이다. 인간이 편리하고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런데 편리함이란 진보의 칼끝이 우리의 심장을 향하고 있다. 무엇이 진보이며, 무엇이 인간을 위한 것인지 진지한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

진보의 변증법은 진보의 내면에 퇴행의 의미가 숨어있음을 누설한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끊임없는 진보가 내리는 저주는 끊임없는 퇴행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도르노의 선험적 체험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우리의 진보 행위가 인간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진보가 진보 자체를 위한 진보인지, 그 진보로 인해 인간이 퇴행을 거듭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이미 인간은 많은 부분에서 물화(物化)되었다. 인간은 기계의 부속품처럼 공장에서 일한다. 만약 한 명의 근로자가 아프거나 특별한 일로 일하지 못할 경우 대체 부속품을 제공하듯 대체 인원을 투입한다. 공장뿐만이 아니라 인간은 많은 부분에서 물화된 부속품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잘 정립된 인간의 제도(예를 들어 법률이나 체계와 같은)는 궁극적으로 물화된 인간의 표상이다. 물화된 인간은 모든 문제를 마치 수학공식처럼 대입하여 옳고 그름, 잘잘못을 파악한다. 앞뒤와 전후 상황을 진지하게 따져보고, 철학적으로 생각할 자유의지를 가지지 못하고 제도라는 공식에 대입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우리는 그것에 합리적 무엇이라 이름 붙였다.

  문학은 물화된 인간이 지켜야 할 인간성의 마지막 보류다. 만약 문학까지 인공지능에 양보한다면 인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문학은 인간의 정신적인 생식기(生殖器)이다. 인간이 생식기를 제거하면 다음 세대로 인간의 유전자가 전달되지 못하듯, 시를(문학을) 제거하면 우리의 정신적인 유전자는 우리의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류의 정신적 멸절이다. 인간이지만 안드로이드 로봇처럼 껍데기만 인간으로 살아가는 비()인간이다.

  당신은 로봇과 같은 삶을 살고 싶은가? 철저히 01에 의지하여. 좋고 나쁨이, 옳고 그름이, 내가 원하고 원치 않고 아닌, 기분과 감정을 벗어난 단순히 01에 연역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원칙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회가. 그렇게 걱정과 배고픔이 소멸한 사회가 진정 행복한 사회, 우리가 꿈꾸던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가? ()도 문학 작품도 무엇인지도 모르는 비인간적인 사회가.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정신이 황폐해진) 배부른 돼지의 세계다.

* 2016년 첫날을 기념하여 시(詩)가 아닌 한편의 산문을 올립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한 번은 고민해야 할 부분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램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주영헌

 

출처- 세상을 말하다 naver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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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1 외국여성들도 눈물 흘린다는 "대한민국 전통 북춤의 화려함" 백향목 2017.11.03 154
1290 인간의 길흉화복에 하나님께서 관여를 할까요? 안 할까요? 2 돈키호테 2017.10.31 325
1289 애자 소나무 2017.10.31 138
1288 세상의 모든 아침 2 소나무 2017.10.29 201
» “인공지능도 시(詩)를 쓸 수 있을까?” 소나무 2017.10.29 230
1286 블랙호크다운 소나무 2017.10.29 116
1285 독일 안식교 연합회장들과 한국 안식교 연합회장 1 김원일 2017.10.28 516
1284 안식교를 떠나거나 아니면 적어도 잠시 좀 멀리 벗어나보고 싶은 그대에게--수정 (조회수 22 이후) 김원일 2017.10.24 500
1283 아무리 멍청한 목사의 멍청한 설교라도... 1 김원일 2017.10.24 370
1282 10월은 목사님 감사의 달입니다. 2 무실 2017.10.24 231
1281 이 친구 혹시 안식교인? ^^ Shabbat의 정신을 엘렌보다 더 잘 파악한 사람 김원일 2017.10.22 411
1280 가을노래 1 file 소나무 2017.10.22 176
1279 회원등록과 로그인 사용자 글쓰기 권한에 대해 알려 드립니다. 기술담당자 2017.10.19 395
1278 어떤 신학생이 내게 보낸 문자 2 김원일 2017.10.19 431
1277 악플에 시달리다가 이곳을 떠난 누리꾼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 누리 등록제로 바뀝니다. 필명 허용은 물론 계속 유지합니다. 1 김원일 2017.10.19 257
1276 하나님의 은혜 2 전죄인입니다 2017.10.19 141
1275 감사한 죄, 교회 다니는 죄, 안식일 지키는 죄 4 아기자기 2017.10.18 395
1274 좋은글과 차한잔하는 여유 1 마음파동 2017.10.18 160
1273 계란 후라이 맛있게 만드는 법 2 file 김균 2017.10.18 793
1272 안내의 말씀 2 안내문 2017.10.18 574
1271 가을 볕에 1 한잎 두잎 2017.10.18 119
1270 이 글을 시비걸거나 빈정거리는 것으로 보지 마시고 한번 읽어 봐 주세요. 11 꼬꼬댁 2017.10.18 329
1269 이 글이 우리 목사님들께도 해당됩니까? 산 사람 2017.10.17 207
1268 목적이 사라진 민초 5 만세만세만만세 2017.10.17 346
1267 한국 대표보수의 수준과 영국대사의 일갈.... 3 일갈 2017.10.16 114
1266 아야금의 가야금 연주와 노래,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마음파동 2017.10.16 75
1265 가을 엽서 3 한잎 두잎 2017.10.16 159
1264 이사야여, 이사야여, 채빈 님이여, 채빈 님이여... 3 김원일 2017.10.15 279
1263 오늘 안산에 가고 싶다. 김원일 2017.10.15 162
1262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동거차도 2017.10.14 145
1261 대전MBC 시사플러스 GMO, 얼마나 알고 드십니까? 마음파동 2017.10.13 67
1260 "GMO의 저주"…美 농무성 과학자의 양심고백 12 마음파동 2017.10.12 348
1259 이상한 나라 북한? 더 이상한 한국?--Intelligent하고 정확한 분석 2 김원일 2017.10.11 172
1258 GMO 식품 7 knl 2017.10.10 625
1257 옛 사이트는 (minchosda.com) 어떻게 되는가. 김원일 2017.10.10 229
1256 오늘 글쓰기 문 열었습니다. 1 김원일 2017.10.10 233
1255 이 누리 이름 바꾸기: minchosda.com-->minchoquest.org 1 김원일 2017.10.04 454
1254 똥개는 짖어도 달리는 민스다 기차. ^^ 잠시 휴업함돠. 김원일 2017.10.02 318
1253 1095회 "140억은 누구의 돈인가? - BBK 투자금 진실게임" (2017년 9월 28일 토 방송) 이명박 장로 2017.10.02 65
1252 역마살 file 김균 2017.10.01 205
1251 십일조 내면 못가는 나라 안식일 지키면 못가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 2 fallbaram. 2017.10.01 354
1250 명쾌한 설명…헌재, 박근혜 파면 선고 순간 태극기 2017.10.01 109
1249 지난 시절 아재개그 하나 아재 2017.10.01 146
1248 결론으로 말하는 정죄 1 file 김균 2017.10.01 228
1247 개꿈 4 file 김균 2017.10.01 213
1246 현대종교의 이단까톡 - 이단들이 진행하는 팟빵 알리미 2017.09.30 184
1245 김광석 1 억울해 2017.09.30 104
1244 JMS 신도들은 정명석씨가 성범죄자임을 인정할까요? 옆집사람 2017.09.30 131
1243 화잇 여사의 비서 Fanny Bolton의 양심선언 2 옆집사람 2017.09.29 475
1242 반드시 죽여야 할 것과 반드시 살려야 할 것 2 fallbaram. 2017.09.29 186
1241 화잇과 교황, 화잇과 이만희라는 '전제' 아래 쏟아 놓는 모든 논리는 거짓일 뿐! 1 file 비단물결 2017.09.29 283
1240 엘렌 화잇의 표절에 대한 대총회 연구-Rilke 4 김균 2017.09.29 747
1239 1980년 재림교단 총회에서 무엇을 조사했을까요. 2 옆집사람 2017.09.29 561
1238 계명으로 뭔가를 얻고자 하는 분들에게 5 김균 2017.09.29 245
1237 옴진리교와 일본사회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 노란리봉 2017.09.29 95
1236 이런 소리도 계속하면 교리가 된다 3 file 김균 2017.09.29 366
1235 지금이 어느때인데 선지자라니 5 fallbaram. 2017.09.29 274
1234 (충격) 서해순 인터뷰서 흥분해 욕설 대폭발! 엘리스 2017.09.28 125
1233 거짓 선지자의 증거 눈뜬자 2017.09.28 137
1232 어느 얼간이 재림교인이 '화잇의 무오설'을 믿으며 화잇을 '신격화'(???)하는지 찾아 오시라! 6 비단물결 2017.09.28 290
1231 선지자 중에는 거짓 선지자가 있다고 합니다. 1 피터 2017.09.28 131
1230 진드기(응애)는 왜 동물에게 자꾸 달라 붙을까요? 셋째천사 2017.09.28 216
1229 나의 구원 너의 구원 2 file 김균 2017.09.28 249
1228 반상순 장로님! 2 비단물결 2017.09.28 565
1227 Ellen Harmon White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이 책을 재림교단이 한국어 판권을 사놓고서도 출간하지 않는 이유 1 통곡의벽 2017.09.28 206
1226 정중히 요청합니다^^ 1 반상순 2017.09.28 362
1225 갈라디아서 2장 3 등대지기 2017.09.28 103
1224 매도당하는 칭의주의 5 file 김균 2017.09.28 222
1223 고추 먹고 맴맴 새우 먹고 맴맴 6 file 김균 2017.09.28 254
1222 류효상의 신문을 통해 알게된 이야기들 (9월 27일) 스파이더우먼 2017.09.28 65
1221 심판자가 바뀌었다 김균 2017.09.27 171
1220 1844년 10월 22일에 있었던 일에 관한 기록 1 히스토리 2017.09.27 121
1219 어제는 fallbaram. 2017.09.27 102
1218 웬지 가을에 읽어야 할 것 같은 시 한편 2 한수산 2017.09.27 84
1217 남자들은 왜 TV/스포츠 보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가? 배달부 2017.09.27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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