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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교회를 가다㉟ 재림교회(안식교)-하<연재>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75회)
최재영  |  9191j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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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12  00: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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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65회부터는 남측 교회와 해외교회가 주도해 북측 영토에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건축사업이 중단된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그 원인을 통해 합의점을 찾고자 한다. 이중에는 ‘평양조용기심장전문병원’내에 마련될 30평 규모의 ‘병원교회’와 평양 대동강변 IT단지에 설립될 ‘평양국제하베스트교회’, 예장 합동 측의 ‘평양장대현교회’등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현재 추진 중인 미국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의 주도로 지어질 ‘평양국제외국인교회’도 다루고 평양 조선영화촬영소 산속에 지어진 ‘형제산교회당’과 거기 딸린 목사관을 방문한 이야기를 전할 것이며 나진선봉교회도 다룰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분류된 ‘통일교’가 평양보통강호텔 앞에 설립한 ‘국제평화센터’와 평화자동차 공장 방문이야기들을 다룰 것이며 안식일교와 몰몬교의 대북사역 등도 심도 있게 다룰 것이다. / 필자 주 

 

김일성 주석 가문과 안식교와의 관계
    
안식교가 조선에 들어온 시기는 1904년으로 일반 개신교보다 10년 정도 늦게 들어왔다. 그러니까 한일합방이 되기 6년 전 안식교 최초의 선교사 스미스(W. R. Smith) 목사가 현재의 평양지역이었던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의 진남포, 용강, 강서, 중화 등 여러 지역에 직접 복음을 전파하며 조선 재림교회(안식교) 역사가 시작됐다. 특히 일본의 ‘쿠니야 히데’목사가 진남포에 방문해 특별집회를 열었으며 나흘 후 미국 안식교 선교사 신분의 일본 미션책임자 필드(F. W. Field) 목사가 연이어 방문해 힘을 보태주며 50일간 안식교를 전파하자 많은 이들이 받아들여 71명이 침례를 받고 안식교 신자가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용강군 선돌(입석리), 강대모루(강서군 남3리), 용동(용강군 구룡리), 바매기(중화군 한곡리) 등에 안식교 교회당이 세워진 기록적인 결실이 맺혔다.
    
안식교는 교세가 더 확산되면서 김일성 주석이 태어난 대동강 하류 만경대 남리(南里) 마을에도 칠골안식교회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김일성 주석의 생가와 동향이던 서울 동도교회 최훈(崔薰) 목사가 필자에게 해방 전 만경대 주변 마을들에 세워진 장로교회와 안식교회와의 관계를 증언해 준 적이 있었는데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한기총 5대 회장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 69회 총회장을 지낸 개신교 원로였던 최 목사는 교회를 은퇴 후 경기도에 있는 ‘천마산기도원’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때 필자가 여러 번 찾아가 해방 전 이북교회 상황과 김일성 주석에 관한 기독교 관련 증언자료를 수집했던 적이 있다. 그 후 2008년 최 목사가 노환으로 타계하자 미국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 때 필자가 운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최 목사의 조부 최재식은 일찍 개화해 만경대 고향마을에 ‘송산리교회’를 세운 주역이었으며 부친 최병록도 기독교학교인 평양숭실학교 출신이었다고 한다. 1926년생인 최 목사가 태어나 자란 곳은 평양시 최남단 대동강 한 가운데 양각도를 건너가는 나루터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는데 유년시절에는 고향 송산리에 있는 신망학교(信望學校)라는 국민학교에 입학해 6년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경성상업학교에 다닌 후 졸업하고 다시 고향으로 와서 평양철물조합에 근무했고 해방이 되자 송산리에 있는 송산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교사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재건교회를 설립해 전도사가 되었으며 1947년에는 고향마을을 떠나 안식교가 운영하는 ‘의명학교(義明學校)’가 있는 ‘순안면(順安面) 원일리 28번지’로 거처를 옮겨 그 곳에서 재건교회의 담임전도사로 본격적인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의 고향집과 주변에 있는 마을 교회들에 관한 그의 증언을 들어보자.

“나는 김일성 주석과 같은 고향인 만경대이다. 같은 만경대라도 김성주(김일성 주석)는 남리(南里)에 살았고 나는 송산리(松山里)에 살았다. 그 시절에는 개신교 지도자들이 안식교를 이단시하는 풍조 때문에 조그마한 고개를 사이에 두고 두 동네가 서로 갈라져 있었다. 남리에는 안식일 교회 예배당이 있고, 송산리에는 장로교 교회당이 있어서 서로 갈라져 지냈던 것이다. 두 동네는 안식교에 대한 편견 때문에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해방 후 김일성 주석이 평양에 입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하자 남리(안식교)에 있던 사람들은 김일성의 정책을 지지하며 가깝게 지냈으나 송산리(장로교)에 사는 사람들은 김일성과 반대 입장에 서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47년도 무렵 송산리에 군관학교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송산리 마을 주민 20여 세대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최훈 목사의 이 같은 증언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은 많이 있다. 우선 북에는 김일성 주석의 출생지가 공식적으로 “평남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로 표기되어 있는데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양 만경대구역 만경대동’이다. 또한 장로교단이었던 송산교회의 주소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송산리(松山里) 196번지’였는데 이곳도 역시 현재의 행정구역상 김일성주석의 출생지와 동일한 ‘평양 만경대구역 만경대동’이다. 1952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송산리, 남리, 내리, 서리를 합해서 ‘만경대리’를 만들었다가 그 후 1963년에 ‘만경대동’이 되었기 때문이다.
    
송산교회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의 군사대학(국방대학원)이 위치해 있는데 김일성 주석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송산이라면 지금의 군사대학이 있는 곳인데 거기에 장로교 계통의 례배당이 하나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어 그곳에 군사대학이 들어섰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필자도 방북 일정 중에 간혹 만경대지역을 지나칠 경우에는 군사대학 부근을 지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송산교회가 있던 자리였음을 상기한다. 그곳은 멀찌감치 송산유원지도 바라보인다. 김 주석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송산교회를 다닌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어른들이 례배당에 갈 때면 아이들도 따라 가서 례배를 보군 하였다. 신자의 대렬을 늘이려고 례배당측에서는 이따금씩 아이들에게 사탕도 주고 공책도 주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받아보는 멋에 일요일만 되면 패를 지어 송산으로 밀려 가군 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호기심이 나서 동무들과 함께 가끔 송산으로 다니였다...(중략)...나는 어머니가 례배당에 갈 때에만 송산으로 다니였다.”
   
그런데 예전부터 필자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김일성 주석과 안식교에 관련된 소문이 내 귀에 종종 들려왔는데 확인해보니 그것은 안식교 내부에서 오랫동안 끊이지 않고 나도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었다. 내용인 즉 “유년시절의 김일성과 그의 일가친척들이 모두 안식일 교회당에도 다녔다”는 것이다. 안식교 신자들은 지금도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김 주석이 어릴 적에 가끔 다닌 교회가 안식일 교회였으며 주일학교도 안식일교회에서 운영하는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만경대 송산리에는 장로교회가 있었고 남리에는 칠골안식일교회가 있었는데 김일성의 조모 리보익은 그 칠골안식일교회의 독실한 신자였으며 외할아버지 강돈욱도 칠골안식일교회 장로였다”는 증언도 잇따라 나오고 있었다.
   
이번 방북기에는 이 같은 여러 소문의 진상에 대해 필자가 다양한 자료와 경로를 통해 확인하고 연구한 이야기를 다룰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의 가문과 안식교와의 관계에 있어 연구하던 중 필자가 주목하는 인물은 정작 김일성 주석이 아니라 사촌동생 김원주(金元柱)와 할머니 리보익이었다. 왜냐하면 이 두 인물은 김 주석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실제 안식교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이런 이야기들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통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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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주석의 생가 안 뜰을 찾은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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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경대구역 칠골교회당을 찾아 백봉일 담임목사와 함께 주일예배 마지막 찬송을 부르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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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경대 생가 안방에는 김 주석의 조부모 사진을 비롯해 해방 후 할머니 리보익과 첫 상봉을 하는 장면 등 7개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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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경대 생가 옆 산마루에 올라가면 만경대 누각이 나온다. 만 가지 아름다운 자연풍치를 볼 수 있는 곳이라 해서 만경대(萬景臺)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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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를 담당한 북 안내원과 함께 만경대 누각에서 기념촬영.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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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강과 아름다운 노송을 배경으로 만경대 누각 앞에 걸터 앉은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만경대 사적관’에 전시된 김일성 친가의 항일투쟁 사료들
    
필자가 김일성 주석의 생가 인근에 있는 ‘만경대 고향집 사적관’을 방문할 때 해설사로부터 들은 기억으로는 김성주(김일성)가 태어날 당시 만경대는 20여 호 농가가 모여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 사적관은 생가에서 우측으로 약 200미터 가량 떨어진 언덕에 아름다운 나무들 사이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김 주석의 60세 탄생을 2년 앞둔 1970년에 개관되었다는 이곳은 김 주석과 일가친척들의 다양한 항일투쟁 발자취를 여러 사료와 함께 전시해 놓았다. 이곳 ‘만경대사적관’은 김 주석의 ‘친가혈통’을 중심으로 전시된 사적관이라고 한다면 외가혈통을 중심으로 전시된 곳을 참관하려면 칠골교회당 옆에 있는 ‘칠골혁명사적관’으로 가야만 한다.
    
사적관 1호실에는 어린 시절의 김성주가 부친에게 교육받는 모습을 형상화한 석고상이 있고, 2호실에는 유년시절을 보낸 1920년대의 만경대 전경을 보여주는 사판이 있다. 또한 증조부 김응우, 조부모 김보현과 리보익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들과 부친 김형직의 청소년시절과 활동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3호실에는 부친 김형직이 조선국민회를 결성한 발자취들과 모친 강반석, 삼촌 김형권, 동생 철주, 그리고 사촌동생 김원주의 다양한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4호실은 김성주의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마지막에는 이런 자료들을 기초로 제작한 영상물을 10분간 관람할 수 있는 코스가 마련돼 있었다. 또한 마지막 5호실에는 김성주가 어린 학창시절 온 몸으로 겪었던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에 대한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선 삼촌 김형권의 자료를 보면 김형권은 국민부(國民府) 군자금모집대 최효일(崔孝一)과 함께 1930년 8월 풍산군 안산면 내승리(豐山郡 安山面 內中里) 주재소의 송산(松山) 순사부장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또 동년 9월 3일 북정(北靑)서의 강성(岡城) 순사를 권총으을 발사해 부상을 입힌 사건 등으로 체포돼 1932년 4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5년(최효일 사형, 박차석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수감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운명했다. 이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에 모두 6회 정도 상세히 보도됐는데 이곳에 기사가 스크랩되어 전시되었다.
    
친동생 김철주는 1926년 소학교에 다닐 때 형님 김성주(김일성)가 조직한 ‘새날소년동맹’의 성원이 되어 신문 ‘새날’발행에 참가하던 중 1930년대 초반 항일유격대에 입대해 1935년 연길의 석인구 인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20세의 나이로 전사해 그의 유해를 아직도 발견하지 못해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는 가묘(假墓)만 조성돼있다.
    
부친 김형직은 평양숭실학교를 다니던 중 기독교인들 중심의 항일조직인 조선국민회를 조직해 활동하다 1918년 2월 18일 평안남도 일경에 의해 검거돼 형사소추를 받았으며 1925년 4월, 일제에 의해 작성된 관헌기록 중에는 “대정 8년(1919년) 3월, 조선독립 소요사건의 주모자”로서 체포를 피하려 “동년 5월, 대안으로 도주했다”고 기록됐다. 조선국민회 사건 이후 중강진으로 이사해 3ㆍ1만세운동을 지도하며 깊이 관여했다. 김형직은 1924년 말 일제에 체포되어 평북(지금의 량강도) 포평(葡坪)에서 후창(厚昌)으로 압송당하는 도중 김형직의 친구가 일본경관에게 술을 먹이고 취하게 한 틈을 타서 압록강을 건너 무송(憮)松)까지 극적인 탈출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두 번이나 심한 동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5년에는 길림성 무송현으로 옮겨 ‘무림병원’을 차렸고 정의부(正義府)계열 무장단체인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과 연계해 활동하며 민족주의 운동단체 등을 망라해 의원을 통해 벌은 돈으로 정기적인 자금을 공급하는데 기여를 하다가 감옥에서 얻은 병과 탈출 시 발병한 동상 후유증 등으로 건강이 악화돼 1926년 6월 25일, 32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김형직의 항일투쟁 발자취는 량강도 포평혁명사적지(포평교회)와 황해도 은율에 있는 사적관(은율읍교회)등에 기념할 정도로 그의 활동 범주는 다양했다.
   
이처럼 만경대 사적관에는 부친 김형직과 삼촌 김형권, 친동생 김철주, 사촌동생 김원주 4인이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운명했다는 사실들을 구체적인 관련사료들을 제시하며 입증하고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항일투쟁 전력은 대한민국 정부와 학계에서도 이미 검증된 사안이며 필자도 객관적인 연구를 통해 입증한 바 있다. 그런데 필자가 주목한 인물은 남측에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김원주(金元柱)였다. 안식교와 연관이 있다는 김일성 주석의 사촌동생 김원주에 대한 관련 자료를 찾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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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거진 수목에 둘러싸인 ‘만경대고향집 사적관’ 입구 전경.입구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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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를 들어서면 현대식으로 건축된 사적관 본관이 나온다.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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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관 내부 1호실에는 김일성 주석의 증조부와 조부 등 집안 어른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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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의 항일투쟁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가 전시돼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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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주는 김일성의 사촌동생으로 일제치하 노동운동과 공산주의 혁명운동 등으로 일제의 고문을 받아 병약한 가운데 인민군 발전 등에 공헌하던 중 31세로 사망했다(사진출처: 김일성 회고록에 수록된 사진).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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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투쟁으로 일찍 단명한 3인의 가족사진이 만경대 생가 윗방에 걸려있다. 좌부터 삼촌 김형권, 동생 김철주, 사촌동생 김원주. [사진제공 - 최재영]


김일성 주석의 사촌동생 김원주의 발자취
     
김일성 주석과 사촌동생 김원주(金元柱)의 혈연관계를 파악하려면 가계도를 잠시 살펴봐야한다. 김송령(김일성의 고조부)과 나현직은 슬하에 독자 김응우(김일성의 증조부)를 두었으며 김응우는 장성해 부인 이씨와 결혼해 독자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김보현(김일성의 조부)이다. 그리고 김보현(金輔鉉)은 리보익(李寶益)과 결혼해 6남매(3남 3녀)를 낳았는데 그 중 삼형제가 바로 김형직(金亨稷), 김형록(金亨祿), 김형권(金亨權)이며 장남이 바로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이다. 그 아래 남동생들이 차남 김형록, 삼남 김형권이며 세 자매는(金九日女), 김형실(金亨實), 김형복(金亨福) 순이다.
     
김일성 주석의 조부모 김보현과 리보익은 해방 후 손자(김일성)가 집권한 상태에서도  만경대에서 평범한 농민으로서 살았으며 세 아들 중 끝까지 만경대에 거주한 사람은 차남 김형록(김 주석의 둘째 삼촌)뿐이다. 김일성의 할머니 리보익은 항일투쟁 하던 큰 아들 김형직과 작은 아들 김형권 등 두 아들을 일찍 떠나보내고 유일하게 둘째 아들 김형록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또한 막내삼촌 김형권은 생전에 만주에서 김영실이라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녀는 해방 후 만경대 혁명학원을 다녔지만 전쟁 시기에 폭격으로 사망했고, 둘째삼촌 김형록은 현양신과의 사이에 6남매를 두었는데 자녀들 중 김원주(金元柱), 김창실, 김원실 등이 있는데 김원주가 바로 안식교 재단에서 운영한 의명학교를 졸업했다.
    
김일성은 해방 후 귀국하자마자 조선인민군 지도자를 배출하는 사관학교의 모체가 되는 ‘평양학원’을 설립해 사촌동생 김원주와 김원주의 부인, 외삼촌 강용석, 할머니 리보익의 조카 김병렬 등을 비롯한 일가친척들을 평양학원 1기생으로 대거 입학시켰다. 평양학원은 조선인민군 건군의 초석이 되는 사관학교를 말하는데 훗날 이곳 출신들이 초기 조선 인민군 지도부의 핵심들이 되었으며 한국전쟁 발발 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다. 김일성이 1945년 11월 17일 평양학원 설립 지시를 구체적으로 내린 후 몇 개월의 준비과정을 거친 후 1946년 1월 3일 ‘평남 용강군 다미면 지울리’에서 개교식을 가졌는데 여기에 김원주가 학교의 기초를 닦고 발전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이 학교는 처음에 정치반과 군사반을 둔 4개월의 단기코스였으나 사실상 사관학교 형태로 운영되었다.
     
북에서 발간된 역사 사전에는 김원주가 ‘1927년 9월 22일 출생’해 ‘1957년 6월 27일 운명’했다고 기록됐으며 특히 ‘음력으로 1927년 8월 27일 출생’했다며 소상하게 덧붙이기도 했다. 북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김원주의 일대기를 요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북에서는 김원주를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적극 투쟁한 반일혁명투사이며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존경하고 있으며 고향과 출생지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오늘의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이며 형님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모습을 가까이서 소식을 접하면서 영향을 받아 1940년대 초에는 김일성의 외척이 되는 강희원(康希源)과 함께 의기투합해 강선제강소 소년공(노동자)으로 들어가 힘겨운 고역에 시달리면서 “일제 침략자들과 착취계급의 본성을 깨닫고 노동자들을 결집해 지하혁명조직을 결성했다”고 한다. 
   
또한 노동운동과는 별도로 “반일 지하혁명조직인 ‘조국해방단’을 결성해 혁명투쟁을 전개해 나갔으며 일제의 무기를 빼앗아자체 무장하며 수령(형님 김일성)의 항일무장조직을 지원하고 후방에서 일제의 군용지습격, 무기탈취를 위한 습격전 등을 벌여 일제를 불안 속에 몰아넣는 과정에서 1945년 5월 일제에 검거되었다”고 한다. “김원주가 체포되자 김일성의 사촌동생이라는 사실이 신문기사의 특호 활자로 찍혔으며 체포 즉시 말로 형언하기 힘든 심한 고문을 당했으며 여러 가지 방법의 회유와 기만을 당했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고 싸웠다”고 기록됐다.
   
해방을 맞아 출옥했으나 고문의 상처와 후유증으로 몸이 매우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잠시도 쉬지 않고 북 인민정부에 협력하며 인민군 창설 사업에 몰두해 성공적으로 창건한 그 후에도 계속 군사교육 부문에 정력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전쟁 중에는 “허약한 몸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끝까지 헌신하였다”고 한다. 특히 전쟁 중에는 “후방의 안전과 인민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투쟁하다가 전쟁이 끝나갈 무렵부터 건강상태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전후에도 계속 사회안전 부분에서 중책을 맡고 활동하다가 1957년 6월 27일 3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돼 있다. 이외에도 김원주의 행적에 대한 자료는 마침 남측 통일부장관을 지낸 강인덕 박사가 신문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직접 알아 본 사실에 대해 증언해 주었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돼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될 때 남북대화 사무국장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이산가족이었던 나는 북에 거주하는 넷째 형님이 아직 생존해있었는데 관리들에게 직접 알아보니까 형님이 ‘당(黨)학교’에서 당사(黨史)를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 북에 끌려갈 당시 여러 가지 이유로 처형될 형편이었는데 김일성 주석의 사촌동생 김원주가 살려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만약 김원주가 죽지 않았으면, 넷째 형님이 좀 더 편하게 살았을 것이다.”

강 박사의 증언을 통해 김원주의 인품과 폭넓은 대인관계를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당시는 항일투쟁의 방편으로 공산주의에 가담해 활동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김원주의 활동은 한마디로 노동운동을 통한 항일투쟁과 공산주의 혁명운동을 병행했던 것이며 특히 그가 설립했다는 ‘조국해방단’에 관한 내용은 강 박사의 증언에서도 뒷받침해주고 있다.

“우리 집안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을 했는데, 형님들은 ‘조국해방단’소속으로 활동했다. 형님들은 1944년 ‘조국해방단’소속인 것이 드러나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5년 광복 후 겨우 풀려 나왔다. 그리고 인민정부는 항일무장단체인 ‘조국해방단’을 민주청년동맹의 기관단체로 만들려고 했으며 ...(중략)... 김원주가 넷째 형님과 ‘너나’하는 사이로 조국해방단 소속이었다.”

그 후 필자가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참관할 때 묘지들을 돌아보며 확인한 바로는 삼촌 김형권, 동생 김철주, 사촌동생 김원주 등 항일투쟁에 참가한 가족들의 묘지는 원래 만경대에 있었으나 김일성 주석의 부친 묘소를 제외한 나머지 3인은 혁명열사릉이 조성될 때 이장되어 지금까지 이곳에 안장돼있었다. 그렇다면 손자 김원주에게 안식교 신앙과 삶에 영향을 끼쳤다는 할머니 리보익에 관해 잘 알려지지 않은 활동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두 손자(김성주, 김원주)에게 큰 영향을 끼친 할머니 리보익
 
김일성(김성주) 주석은 그의 회고록에서 할머니 리보익에 관해 많은 분량을 애틋하고 허심탄회하게 술회했는데 자신의 가문에서 가장 큰 고생을 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어른으로 자신의 할머니를 언급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자신이 항일유격대를 이끌며 한창 일제와 투쟁하던 시절에는 자신 때문에 할머니가 두 차례나 일제에 의해 억류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을 통해 할머니의 대한 미안한 마음과 존경의 마음을 나타냈다.  김일성으로 하여금 제국주의와 맞붙어 싸울 동기부여와 용기를 더욱 제공해 준 이 사건의 발단을 들여다보자.
  
일제가 김일성을 체포하기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엄동설한에 김일성의 할머니를 1년 반이 넘도록 만주 산악지방으로 끌고 다니며 두 차례나 회유하는데 이용했는데 첫 번째는 서간도 산악지방을 1년 가까이 끌고 다녔고, 두 번째는 북간도를 서너 달 끌고 다니며 할머니를 혹사시켰는데 김일성 주석은 훗날 당시를 회상하며 할머니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했다.

“할머니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직업적인 혁명가도 아니다. 학교를 다닌 적도 없고 조직적인 혁명교양을 받은 일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되여 글도 모르는 촌늙은이가 적들과 그처럼 당당하게 대결할 수 있었으며 매사에 처신을 그처럼 지혜롭고 대바르게 할 수 있었는가고 말입니다.”

이제부터 회고록 내용을 통해 할머니 리보익이 두 차례나 끌려 다닌 이야기를 알아보도록 하자. 일제는 중일전쟁 무렵 항일 유격대장이던 김일성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대대적인 귀순공작이었다. 학창시절 동창생들과 교사들, 연고자들, 옥중에서 전향한자들, 일가친척 등 닥치는 대로 귀순공작에 끌어들였으며 나중에는 조부모에 대한 손자 김일성의 효성을 악용해 만경대 고향집까지 가서 할머니를 붙잡아 백두산 일대를 휘젓고 다닐 정도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온갖 고초를 겪게 했다. 이 사건은 화성의숙 시절의 동창생 박차석이 연루되었으며 리종락과 박차석이 일제에 회유당해 김일성을 설득하려고 할머니를 귀순공작에 동원시킨 것이다.
   
처음에 이 두 사람은 만경대 집을 찾아와 김일성의 조부모에게 뭉칫돈 수백 원을 내놓으며 회유를 했으나 할아버지가 돈뭉치를 마당에 내동댕이치며 “내 아들 형직이와 형권이가 죽은 것만 해도 가슴이 터진다. 내 눈앞에서 썩 물러들 가라”고 호령하자 하는 수 없이 할머니 리보익을 총대로 위협해 만주로 데리고 간 것이다. 당시 몽강일대에서 부대를 이끌고 전투를 벌이던 김일성은 자신의 할머니가 장백현 가재수라는 마을에 끌려와 연금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처음 그 소식을 듣자마자 몸이 떨리고 속에서 불이 일어나 견디기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영하 40도가 되는 엄동설한에 고령의 노인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고생시키는 적(일제)을 향해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작전상 할머니를 지척에 두고도 구출하지 못하는 손자는 안타까운 심사에 할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일제 사주를 받은 귀순공작단원들에게 자신의 친할머니가 붙잡혀와 온갖 수모를 당하며 1년 가까이 서간도의 산악지방을 끌려 다는 것을 장손으로서 가슴에 맺힌 한과 불효로 남아있던 것이다. 그러나 리보익은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버티며 공작단과 맞서 싸운 결과 다시 만경대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또 다시 공작단에 붙잡혀 가는 고초를 당하게 된다.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달리 림수산이라는 인물이 주도하는 공작반에 의해 붙잡혀 갔는데 이번에는 북간도 땅으로 끌려 다니며 온갖 고생을 했다. 당시 김일성은 안도현 처창즈 부근에서 활동하던 중 할머니가 또 다시 끌려와 만주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이번 공작반원 대다수가 일본인 특무들로 구성되었는데 알고 보니 림수산이라는 자는 하필 김일성의 주력부대에서 참모장을 하던 인물이었는데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배신을 한 것이다. 만경대로 간 림수산은 원래 삼촌 김형록을 인질로 끌어가려 했는데 조부모의 완강한 반대로 할머니를 끌고 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있어 김형록은 슬하에 아들 삼형제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대를 이을 아들이라 조부모는 길길이 날뛰며 반대했다고 한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이미 장남(김형직)과 삼남 (김형권)을 잃었는데 차남(김형록) 마저 끌려가는 것을 도저히 볼 수 없어 사생결단으로 항거하자 옆에 있던 김형록 역시 “조카(김일성)를 잡는 놀음에는 나설 수 없다”며 버티자 림수산 일당은 할 수 없이 할머니를 다시 끌고 간 것이다. 아들을 대신해 북간도의 험한 산천을 몇 달 동안 강제로 끌려 다닌 할머니는 이번에도 말로 형언 할 수 없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수모를 겪었으나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지조를 굽히지 않고 지혜롭고 호탕하게 게 맞서며 대처한 리보익을 일제는 다시 만경대로 데려다 주었다. 
  
이런 할머니였기에 김일성 주석은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을 회고할 때마다 어머니 못지 않게 할머니가 정신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어머니의 등에 업혔던 기억보다는 할머니와 고모(김형실)에게 업혀 다닌 추억이 더 많았다고 했다. 특히 아버지 김형직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 가문의 장손인 자신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몇 곱절 더 강했으며 부친이 운명하고 장례식을 치룬 몇 달 만에 무송 양지촌에 조성된 부친 묘소를 찾았을 때 비로소 할머니 마음의 중심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묘 앞에 엎드려 슬프게 곡을 한 다음 ‘증손아, 이제는 아버지가 메고 있던 짐을 네가 메야겠구나. 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어이 나라를 찾아야 한다. 나나 어머니에게 효도를 못해도 좋으니 조선을 독립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거라’. 나는 할머니의 그 말씀에서 큰 충동을 받았습니다. 만일 그때 할머니가 조선독립이 아니라 앞으로 부자가 되거나 출세할 생각이나 하라고 하였더라면 나는 그다지 큰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김일성은 이 날 큰 감동을 받고 독립운동에 더 큰 결의를 다졌다고 했다. 그 후 리보익은 항일투쟁을 하던 장남과 막내아들을 나라에 일찍 바치고 유일하게 남은 차남 김형록의 핏줄이자 자신의 손자인 김원주를 장손 못지않게 끔직히 위해주며 한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왜정 말기 부모를 모시며 만경대에 살던 김형록은 일제의 눈길을 피해 남포 앞바다에 가서  남몰래 고기잡이를 해가며 간단한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원주 역시 김성주(김일성)과 마찬가지로 할머니를 매우 잘 따랐는데 해방 후 귀국해 사회주의 인민정부를 세우며 분주하게 활동하던 사촌형 김일성을 돕는데 적극적이었으며 할머니도 자신의 자녀손들이 김일성을 돕는 일에 앞장서도록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해서 할머니 리보익은 김일성이 만든 평양학원(조선인민군 사관학교)의 토대를 놓는데 자신의 조카 김병렬은 물론 손자 김원주와 손자며느리 등 온 가족을 창설 멤버로 활약하게 했다. 비록 시골 농부의 아내에 불과한 촌로이지만 할머니 리보익은 틈틈이 만경대의 교회를 다니며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통해 신세대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식들도 희생시킬 수 있는 철저한 애국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다. 또한 리보익은 해방을 맞아 귀국해 집권한 장손(김일성)이 정부를 수립하고 국가수반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죽는 날까지 만경대에서 평범한 농민으로 생활하다 1959년 10월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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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주석의 사촌동생 김원주의 청소년 시절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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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주석의 할머니 리보익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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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주석의 조모 리보익이 바느질하는 모습. 안식교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만경대 마을에 있던 안식일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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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는 항일유격부대를 이끌던 김일성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으로 귀순공작반을 가동해 할머니 리보익을 두 차례나 북간도와 서간도를 1년 반을 넘게 끌고 다니며 회유를 했다. 관련된 내용이 수록된 ‘세기와 더불어’회고록 캡쳐. [사진제공 - 최재영]


김 주석의 할머니와 사촌동생이 안식교 신자였다는 근거
    
필자는 앞의 방북기에서 밝힌 대로 일제치하 감옥에서 순교한 안식교 지도자 최태현 목사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그의 막내아들 최희만(안식교 장로, 미국 남가주 거주중 타계)의 생전 증언을 통해 김원주가 안식교 신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희만은 김일성의 사촌동생 김원주와 함께 순안에 있는 안식교 계통의 의명학교를 다녔으며 김원주와는 친구 관계로서 같은 반 학생이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최희만의 누나 최옥화(안식교 집사, 미국에 거주 중 타계)가 직접 자신들(김원주, 최희만)이 속해 있던 반을 가르치는 교사였다고 한다. 최옥화 선생은 당시 미혼이었으며 대개 외국선교사들이 교사로 근무했던 의명학교에 조선인 신분으로 교편생활을 했던 수재였다고 한다.
     
‘평원군 순안면 포정리 석박산’기슭에 위치한 의명학교의 부지는 당시에도 5만 5천 평이나 되는 엄청난 크기라 마치 대학교 캠퍼스 수준이었으며 부지 내에는 의외로 학교 건물이 아주 많거나 웅장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학교가 위치한 순안은 평양중심부에서 60리나 떨어져 있고 만경대에서는 먼 거리는 아니다. 당시 재학생들이 순안에 있던 학교를 통학하려면 대부분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공부를 해 학업을 마쳤으며 학교에는 채플실(예배당)이 있어서 1주일에 두 차례 의무적인 예배가 드려졌고 교과목에는 성경과목이 별도로 있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최옥화 선생은 한 동안 김일성과 김원주의 친할머니인 리보익의 만경대 집에서 함께 기거하기도 했는데 손주를 끔찍이 아끼던 할머니의 배려와 요청으로 간혹 만경대 김원주의 집에서 생활했으며 할머니와 함께 가까운 칠골 안식교회당을 다녔다고 한다. 한편 김원주와 최희만이 다닌 의명학교는 신사참배를 수용(1936년 1월 17일)하는 과정에서 미션스쿨로서의 정체성에 큰 타격을 입었고 이 때문에 학교가 안식교 교단으로부터 독립(1937년 7월) 해 지역학교로 탈바꿈하며 학교 이름도 ‘순안아카데미(Soonan Academy)’로 바뀌었고 그 후 1943년에는 학교명칭이 또 다시 ‘순안중학교’로 개칭되어 일반중학교가 됐다. 일반학교가 됐지만 대다수의 교사와 학생들은 여전히 안식교 신앙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김원주와 최희만은 의명학교를 졸업하며 모든 중등학교 교육을 무사히 이수했으나 고등학교 과정은 만경대 인근 지역에 없었기 때문에 당시 상급학교를 진학하려면 평양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주로 서울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 최희만도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서울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하고 유학 준비를 마쳤다. 이때 김원주도 최희만과 함께 서울로 유학을 갔으며 김원주의 입학 절차도 최옥화 선생을 비롯한 최희만 집안에서 도움을 주어 성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38선이 그어지며 국토가 분단되는 과정에서 만경대 고향집에서 김원주를 데려갔다고 한다. 아마도 김일성이 귀국하며 집권하는 과정에서 분주하고 인재가 필요한 상황에서 자신의 사촌동생 김원주를 데려간 듯하다. 만경대 집안에서 김원주를 데려간 후에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던 최희만은 그 후 김원주의 생사여부 조차 확인 할 길이 없이 평생을 살아왔다.
     
그 후 재미교포가 된 최희만은 미주의 안식교 장로로서 평양 김만유병원 개건과 의료지원 등을 위한 대북지원사업을 위해 여러 차례 방북하는 과정에서 김원주의 행방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그 결과 60세도 안되어 사망했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확인한 대로 김원주는 고등학교 과정을 서울에서 공부하던 중 고향 만경대의 부름을 받고 학업을 중단한 채 평양으로 올라간 후에는 사촌형님인 김일성이 직접 개교한 조선인민군 사관학교(평양학원)를 개교하는 사업에 공헌했으며 자신도 1946년 1월 3일 제1기생으로 입학한 사실이 확인됐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리보익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한 김원주는 유달리 영특하고 의협심이 강했으며 할머니에게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둘째아들 김형록 의 핏줄이어서 김원주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매우 애틋했다. 평소 할머니를 가까이 하며  영향을 받은 김원주는 할머니가 믿는 안식교의 영향을 받으며 칠골안식일교회당을 따라 다녔으며 안식교재단의 의명학교를 입학해 졸업할 때까지 다녔으며 해방 후 사회주의 인민정부가 들어서며 사회주의 건설의 바쁜 와중에서 교회와 멀어진 듯하다.
    
김일성 주석의 가문과 안식교와의 관계에 대해 증언을 해준 인물은 또 있다. 안식교 신자로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근거가 확실해 국가보훈처로부터 훈장을 받은 최경선 선생과 그의 자녀들은 자신의 부친이 칠골에 있는 안식일교회를 세운 주역이었으며 손자 김원주가 할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아 독실한 안식교 믿음을 소유한 것으로 증언해 주었다. 김원주가 할머니의 영향 아래 안식일 신앙을 소유했고 마을에 있던 안식일교회당을 다닌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북의 기독교를 이끌어가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에서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칠골교회당 인근에는 한국전쟁 이후에도 오랫동안 칠골안식일교회당이 남아 있었으나 근래 들어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며 도시가 개발되는 과정에서 철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초기 한국교회사가들과 북 연구가들은 김일성 주석과 부모의 신앙은 일반 개신교 교단이었으며 감리교와 장로교회를 다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목사와 장로가 유난히 많았던 김일성주석의 외가 어른들도 일반 개신교를 다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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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만경대를 방문해 할머니와 다정하게 기념 촬영하는 김일성 주석. 좌부터 할머니 리보익, 김일성, 할아버지 김보현, 고모 김형실(金亨實).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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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안 의명학교 재학생들의 졸업식 기념사진(1916년도 졸업사진).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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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후 만경대를 방문해 할머니와 고모들과 다정하게 기념촬영하는 김일성 주석. 앞줄 좌부터 고모 김형복(金亨福), 할머니 리보익, 김일성, 고모 김형실(金亨實). 뒷줄은 김일이 어린 김정일을 안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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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직후 만경대를 방문한 김일성이 이웃 주민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1945.10.14.). [사진제공 -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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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9 성경을 읽다가 문득. 3 4차원의 그림자 2018.03.13 275
1378 지혜=생명 나무 1 김운혁 2018.03.12 183
1377 미투가머길레! fmla 2018.03.11 172
1376 여성의 날 원조 김원일 2018.03.09 161
1375 특사단 만난 김정은 첫마디 "남측 어려움 이해한다" - 청와대가 밝힌 대북 특사단 1박 2일 이모저모 녹색세상 2018.03.08 147
1374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김균 2018.03.07 186
1373 초신자의 질문 입니다. - 만인 구원론에 대해 궁금한 점 여쭙니다. 7 4차원의 그림자 2018.02.26 417
» 최재영목사의 김일성과 안식교 1 지경야인 2018.02.26 324
1371 동고동락 2 file 김균 2018.02.26 260
1370 제발 ! 먹지 마시오 소나무 2018.02.26 213
1369 내 삶의 현장에서의 신앙 소나무 2018.02.25 134
1368 그사람 6 file fmla 2018.02.22 302
1367 50%의 구원과 99%의 구원 8 file 김균 2018.02.18 398
1366 평창 올림픽 NBC 망언 이후 우연히 눈에 띄는 글 소나무 2018.02.11 333
1365 재림마을 어플과 새 찬미가 3 file 김균 2018.02.11 675
1364 제목도 없는 글 3 소나무 2018.02.11 213
1363 조용한 이동네에 첫눈이 온다구요 3 jacklee 2018.02.09 239
1362 “큰 동풍으로“ 부는 바람 4 file 김균 2018.02.06 353
1361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김균 2018.01.24 544
1360 나 혼자 서 있는 게 아니구먼 1 김균 2018.01.21 317
1359 민초를 다시 생각한다 2 김주영 2018.01.20 481
1358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지키기 1 무실 2018.01.20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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