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아들들과 종들의 딜레마 – 불량한 하나님과 가출한 하나님

by 아기자기 posted Nov 29, 2016 Replies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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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론의 딜레마

 

한 순간에 열 자녀들과 모든 종들과 재산을 잃은 불행을 당한 욥의 억울함, 

그래도 욥에게는 자신의 목숨만은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배(?)로 주시는 하나님이 존재한다.

 

그러나 욥의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좀 얘기는 달라진다.

욥이야 하나님께 완전한 의인이라 칭찬을 들을 정도로 자타가 알아주지만,

욥의 아내는 그런 남편을 둔 죄밖에는 이 엄청난 고난을 해석할 길이 없다.

 

내 친구 부부가 몇 년 전에 아들 하나를 눈앞에서 그만 사고를 당해 잃었다.

친구는 그래도 어찌 견디어 왔지만,

친구의 아내는 그 충격에 정신분열 증세를 보여 아직도 치료 중이다.

같은 고난이라도 자식을 잃은 충격은 어머니에게 훨씬 더 크고 견디기 어려운가 보다.

 

욥의 자녀들은 어떠한가?

아버지 욥을 놓고 벌이는 하나님과 사단의 시험(대쟁투?)에 자녀들은 왜 죽어도 되는가?

욥의 목숨만은 보존하시는 하나님은 욥의 자녀들의 하나님은 아니란 말인가?

 

욥의 종들은 무엇인가?

평생 주인을 위해 종노릇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들은 그저 욥의 종이라는 이유로 죽었고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목사들의 설교에서 조차 무시당하고 언급도 못 받는다.

하나님에게도 욥의 목숨은 중요하지만 욥의 종들은 그저 하찮은 시험용 마루타일 뿐일까?

과연 하나님님의 정의란 무엇일까?

 

300여 명에 달하는 세월호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정의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무한한 지식으로 모든 가능성을 알고 있으면서 완벽하게 선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참혹한 악이 발생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사유의 내적 딜레마에 대한 물음이다. 

악이 실재하고 있는 현실을 앞에 두고 물을 때, 

만일 신이 그것을 막을 힘이 충분히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허용했다면 

신의 '선함'을 부정해야 할 것이고, 

그것을 막고자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면 

신의 '능력'을 부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이 두 가지 신의 속성을 동시에 지지하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내적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불량한 하나님과 가출한 하나님(혹은, 잠자는 하나님)의 문제이다.

 

이러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모순의 해결은 

신의 전지전능함에 의해서 세계의 모든 일이 결정된다는 

잘못된 전제를 제거하는 것에서 찾아야 되지 않을까?

 

전통신학의 신정론은 

크게 보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한다. 

 

보다 고전적인 신정론은 

하나님이 모든 세부적인 일들까지 계획하고 결정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으로서, 

그 논리는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이루어졌지만 모두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첫째, 신의 선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이라는 두 가지 신학적 전제에서 

논리적 연역을 하면 세계에서 악이란 '실제적으로' 발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 입장은 세계에서 경험하는 악이란 

"진정한 악(genuine evil)"이 아니라 

"단지 악으로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쉽게 무너지고 마는 신학적 공상에 불과하다.

 

두 번째 단계의 논리는 세계에 악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는 

"절대적 낙관론"을 편다. 

이러한 주장은 전통신학의 기본 입장이라고 여겨져 왔지만, 

그 주장이 창조주의 "체면을 살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악으로 파괴되어 사라져가는 유한한 존재가 항변하는 질문에 

충분한 신학적 해답을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이럴 때 마지막으로 택하게 되는 세 번째 논리는 

"악의 실재성과 파괴성"을 동시에 인정하면서 

그것을 존재하도록 용인/묵인하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논리 역시 자신이 변호하는 신학적 입장의 논리적 토대마저 허물어버릴 것이며, 

또 똑같은 이유로 신의 무용론을 제창하는 무신론의 반론에 대해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와는 달리, 악의 발생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연관된 것이라고 해명하는 관점이 있다. 

이 자유의지론적 신정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또 신은 전능하니까 그 자유의지를 도로 취하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진 않으시고), 

인간이 그 자유를 남용하여 악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신학적 논리를 갖는다. 

이 입장은 앞에서 서술한 고전적인 입장이 지닌 신학적 문제를 지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입장 역시 신정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한계를 남긴다.

 

첫째, 이 자유의지론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존재를 인간에게만 한정함으로써, 

인간사회(역사)를 벗어나 존재하는 악의 문제

(소위 자연재해나 불가피한 사고 등)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는다. 

 

둘째, 만약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유를 제한하여 

특정한 악의 상황

(예를 들어, 대량살상, 전쟁, 유아의 죽음, 세월호 사건, 욥의 고난 등) 

이 발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셨는데,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예를 들어, 인간을 교육할 목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악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신학적인 해명이 되기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신이 과연 선하신 분인가 하는 심각한 질문을 갖게 만들고 말 것이다. 

 

셋째, 만약 이 신을 선하신 분이라고 고백한다하더라도, 

여전히 그 신이 옳은 선택, 

그리고 최선을 한 것인지를 묻는 실존적 회의는 남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이전의 신정론은 숱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학적 갈등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이 세계를 형성시키는 진정한 힘이 

오직 전지전능한 신에게만 있다는 사고의 전제에 있다. 

이 형이상학적 전제 위에선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악의 책임은 

최종적으로 (그것을 막을 수도 있었으면서도 막지 않은) 

신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신학적 모순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정치철학적 문제까지 유발하는 결함이 있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악까지 신의 계획 속에 있다는 주장은 

악을 발생시키는 불의한 체제를 용인하면서, 

그것에 항거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들을 신의 뜻을 거역한다는 

명분으로 제거하려는 경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를 변혁하려는 창조적인 시대의 자녀를 

적으로 대하는 어리석음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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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from 김근주님의 facebook, 요즘 세태에 <속터지는 예수> "내가 이럴려고..."

 

 

그렇다면, 신정론의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신의 '전지전능'이라는 개념 자체에 

질문을 던짐으로써 찾아볼 필요가 있다.

 

신은 악을 제거할 수 있는 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과정사상은 부정적인 대답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신은 악을 직접적으로 제압하는 힘의 분출이라는 방식으로 활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전능 개념에 대해서 직접적인 도전을 하는 것은 

보다 커다란 우주론적 전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악이란 우주만물의 존재방식에서 필연적으로 형성되는 형이상학적인 실재이기 때문에,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 역시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악이란 "끊임없이 사멸하는" 우주만물의 근저에 깃든 파괴적인 요소이다. 

이 파괴적인 면은 창조적 전진의 이면에 있는 것으로서, 

파괴적인 요소가 없다면 세계 안에서 새로움의 창조라는 것도 있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선의 실현이란 평화를 향한 '모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악의 발생 가능성을 비례적으로 동반하는 위험과 모험을 감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는 (자신이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인과율이라도 변경하거나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전능한 힘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해서 신을 기소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낳는다. 

과정사상에서는 미래에 발생할 사건을 완전히 통제할 힘이란 

(신이라 할지라도)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어떤 결과는 

그것을 낳은 특정한 원인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사건론적 세계관에서는, 

결과는 과거의 새로움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과정 속에서 탄생한 이 새로움은 과거의 원인에 속해 있지 않다. 

따라서 과정사상은 악의 발생에 관하여 신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대신, 악을 이겨내기 위해서 신의 도움을 구한다.

 

우주의 진행 과정에서 악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신의 모험과 

그 모험의 세계로 만물을 불러들이는 신의 활동 역시 계속된다. 

여기서, 악의 문제에 대처하는 종교적 삶에서 

새로운 의미지평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즉 종교적 인간이란 악의 실재성을 이유로 

신의 무능력을 기소하는 사람이 아니라, 

악의 극복을 통해 더 큰 선으로 부르는 

신의 선함을 따르고 닮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신의 힘은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고, 

우주적 질서에 사랑을 심는 작업에서 실패하지 않는 

무한한 사랑과 공감의 힘이다. 

이것이 진선미의 비전으로 끊임없이 악을 극복하며 

평화를 심어가는 신의 우주적 활동의 본성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서의 사람들이 증언하는 방식에 가깝다. 

 

(주: 이것은 전통신학의 철학적인 개념으로서의 '전능성'과는 어울리지 않을지는 몰라도, 

기독교 성서가 지시하는 신의 속성과는 일치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신을 알 수 있는 길이 '기적'에 있지 않고, 

'십자가'에 있다고 본 바울(고린도전서 1:22,23)이나, 

신을 '사랑' 자체로 알고 사랑을 통해서만 

신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다고 본 요한1서의 저자

(요한1서 4:7,8)는 이러한 사상과 연결된다.)

 

그래도 여전히 이런 질문은 계속될 것이다. 

악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능하게 여겨지는 신이 

과연 경배를 받을 만한 존재인가? 

전통신학은 이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대답을 염두에 두었고, 

따라서 신의 인과율적 전능성을 증명하여 종교적 삶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기계론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근대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기독교의 정서에 박힌 익숙함에서 나오는 신학적 타성에 불과하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 발생하는 악을 목도하면서 

그 질문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이 악의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악의 발생 원인에 관한 우주론적 사유와도 연관되어 있지만, 

또한 종교적 삶의 의미를 무엇에 두는가 하는 문제와도 깊이 결부되어 있다. 

종교의 의미를 '자기 보전'을 위한 신과의 '외교'에 둘 것인가, 

아니면 신의 '본질적 의로움'을 닮기 위한 '새로운 미덕의 추구'에 둘 것인가? 

이 둘의 차이가 신정론적 사유구조의 차이를 낳는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등장한 종교들에 대한 판단 기준이다. 

전자의 가치를 붙든 종교는 결코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사멸해갈 것이지만, 

후자의 가치를 붙든 종교야말로 종교적 본성을 꽃피웠다고 칭송될 것이다. 

 

자기를 보존하려는 종교성은, 

자기의 보존을 해치는 것을 악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막지 못한 신을 무능하다고 기소하며, 

그 무능한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가 바친 외교의 공물

(제사, 예배, 헌금, 선행, 각종 종교의식 및 활동)이 헛되었다고 한탄할 것이다. 

 

그러나 신을 닮기 위한 종교성은, 

신을 닮기 위해서 자기를 변형시키고자, 

또한 신을 닮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기에, 

악을 자기보존의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 

신은 악과 맞서도록 하고 악을 넘어서도록 부르는 존재(힘주시는 하나님)로서 경험된다. 

 

당신에게 신은 어떤 존재인가?

    악과 고난을 허용하는 '불량한 하나님'인가, 

    악과 고난을 눈감는 '잠자는(가출한) 하나님'인가, 아니면 

    악과 고난의 삶에 지혜와 용기와 선한 '힘주시는 하나님'인가!

 

당신의 종교적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기 보존적 기복신앙의 삶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닮기 위해 자기와 세상을 변혁 시키는 삶인가!

 

당신은 무엇을 기도하고 무엇을 위해 교회에 다니는가?

 

신정론에 관한 해명은 우주론적 사유를 바로 세우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그 물음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종교적 성찰의 문제이기도 하는 것을 알게 된다.

 

 

* 참고 및 인용 문헌

 

-David R. Griffin,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자연주의적 종교론>, 영문 219-223/한글 367-373) 

-Whitehead, <Religion in the Making> 영95/한90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과정과 실재> 영29/한 98, 82/194, 338/639; 

-Whitehead, <Adventures of Idea, 관념의 모험> 204/321, 237-238/368-369

-Whitehead, <Religion in the Making, 진화하는 종교>, 41/38 

-Heeheon Kim, <For a minjung theology as political panentheism>, 19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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