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경야인 송박영신 촛불문화제를 다녀왔다

by 지경야인 posted Jan 04, 2017 Replies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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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송박영신을 다녀왔다.

광화문 촛불 집회를 계속 참석하는 것은 무슨 특별한 의무감이 있거나

커다란 정치적 의식이 있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남보다 더 약은 모습이 훨씬 많고 정의롭지도 못하고

조금은 비도덕적이고 비 정직하며 거짓이 삶의 일부인양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다.

그렇더라도 내 발걸음이 토요일 오후 5시면 어김없이 광화문으로 향하는 것은 답답한 현 상황이

아니 너무나 부조리한 일들이 뻔뻔하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뭘 잘못했냐는 듯 뉘우침이 없는 모습에 광화문을 향한다.

아련한 빚진 자의 심정이 누가 갚으라고 종용한 적이 없는 그런 과거가 나를 광화문으로 이끄나 보다.

1980년 예수님 재림이 임박했다고 종말론 신앙에 대학을 갔어야 함에도

예수님 재림 하시면 면목 없이 내 욕심만 추구하다 끝나서야 되겠냐고

그래서 복음 에 최전선은 문서 전도라며 20살 사회경험이 전혀 없던 청년의 무모하기만 한 도전이었다.

편한 시조로 문서 전도하는 게 편하고 쉽웠는데

전도가 되려면 예언의 신이라야 한다며

5월18일 광주민주화 운동 그 때 가방에 가득 예언의 신을 서적을 가득 담아 해남으로 생전 처음 세상에 발길을 내딛었다.

초보자에게 나이 지긋한 여 차장님이 2일 동안 도와 주셨다.

둘이 다닐때는 문전 박대를 당해도 웃을 수 있었고.

몇권은 팔 수가 있었다.

혼자 떨어져 문서 전도를 하는데

처음 나섰던 용기는 어디로 가버리고 입에서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아~~

하나님 용기를 주십시오.

기도하고 다시 발길을 움직이나 가는 곳마다 거절이다.

어떤 곳은 큰 가방을 보고 장사꾼 출입금지 란다.

아니 난 장사꾼이 아니라 문서 전도잡니다.

3일 동안 거절만 당하다 보니 점심값이 부담이 된다.

하숙비가 걱정이다.

4일째 어느 가정집을 들어갔습니다.

마침 젊은 주부들이 여럿 모여 있다.

말씀해 보라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젊은 새댁쯤으로 보이는 분이 이런다.

아저씨 장사 처음이시지요?

안쓰러운 물음이었다.

그 말이 어찌나 서럽던지 주섬주섬 책을 다시 가방에 담았다

눈에선 눈물이 핑 돌았다.

방문을 나서는데 막 부른다.

아저씨~~~아저씨~~~

 

그길로 근처 동산에 올라 한없이 울었다.

다음날 하숙집에서 나서는데 분위기가 심상찮다.

광주에 계엄군이 진군하여 광주 사람들을 다~~죽인단다.

험악한 유언비어가 들린다.

광주를 탈출한 젊은이 들이 버스를 탈취해서 해남읍 거리를 돌아다닌다.

버스가 지나가는데 무슨 구혼지 지르면서 동참을 호소한다.

그리고 차량 수가 점점 늘어난다.

그리고 내 앞에 버스가 정차를 하면 옆의 젊은이들이 굳은 표정으로 버스에 올라탄다.

몇 번이나 버스가 섰고 그때마다 사람들이 동참한다.

엉겁결에 나도 버스에 올라탔다.

발을 굴러 박자를 맞추고 전두환이 물러나라 훌라 훌라~~~♬♬♪

난 전두환 이가 누군지도 몰랐다.

차 앞에 한 젊은이가 비장한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한다.

전두환이란 사람이 김대중 씨를 비롯한 민주인사를 가두고

광주에 계엄군으로 광주를 철저하게 봉쇄하여 광주가 풍전등화와 같으니 우리가

광주시민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새 내가 탄 버스는 의자가 사람들로 꽉 찼다

처음 시위 버스가 지날 때는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보던 모습에서 변화가 감지된다.

버스가 지나가면 박수를 치고 용기를 북 돋아 준다.

어느 마을은 어느새 부녀회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차에 올려준다.

다들 어렵던 시절 십시일반으로 모았을 것이다.

어느 마을은 떡을 올려준다.

어떤 아저씨는 지나가는 시위 버스를 멈춰 세우고는 급히 상점에서 사이다 콜라 몇 상자를 올린다.

그리곤 수고들 하라고 격려하다가 다시 상점에 빵봉지들을 한 아름 안고 올려준다.

그렇게 버스는 시내 곳곳을 누비며 전의를 다진다.

밤이 되니 잘 곳이 마땅치 않다.

대흥사 관광지엔 단체 관광객을 상대하는 큰 방들이 있었다.

흔쾌히 내어준 방에서 잠을 자고 근처 상인들과 급히 만든 아침을 김밥으로 때웠다

지금이야 김밥이 흔하디흔한 싸구려 이지만 당시엔 김이 참 귀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얼마나 맛있었던지...........

드디어 결전의 시간은 다가왔다.

버스들이 줄줄이 광주를 향하여 출발을 한다.

성전을 지나 영암을 거처 나주를 쪽으로 힘차게 달린다.

지독히도 심하던 차멀미가 그때는 신기하게도 오지 않았다.

차창 밖으론 노랗게 익은 보리가 물결지고 모내기가 한창인 논들이 보인다.

한참을 가던 버스가 속도를 줄이고 멈춘다.

앞서가던 버스들이 줄줄이 서있다.

앞에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총을 겨냥하고 있어서 갈 수가 없단다.

우리도 무장을 해야만 광주 시민들을 구할 수 있단다.

다시 해남으로 돌아가서 군부대에서 총을 구해서 다시 광주로 가잔다.

버스들이 줄줄이 해남 군부대로 향한다.

아~~~

그런데 군부대에는 이미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이중삼중으로 엎드려쏴 자세 앉아쏴 자세 서서쏴 자세로 철통같이 방비를 한다.

시위대 대표 몇 명이 흰 깃발을 들고 협상에 나선다.

한참을 실랑이를 하며 시민군의 무장을 도와 줄 것을 요청하나 거절을 당하는 모양이다.

대표들이 다시 버스로 돌아오고 경찰들이 관리하는 향토예비군 무기고를 급습하여 무기들을 탈취한다.

우리 버스에도 M1 소총이 들어온다.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진다.

나의 뇌리에도 죽음이라는 의식이 자리한다.

버스 운전사가 운전을 거부한다.

늙은 부모와 마누라와 자식이 있다 나는 죽기 싫어서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단다.

그때 과격한 한 남자가 총을 겨눈다.

당신만 부모가 있고 우린 없는 줄 아시오

갑시다.

못갑니다.

옥신각신 하는데

뒤쪽에서 한분이 나선다. 그 분 보내주쇼 내가 운전하리다.

나에게도 총한 자루를 주는데 난 총을 쏴 본적이 없다

고등학교에서 교련으로 M1소총을 분해 소지까지 수없이 해봤어도 정작 사격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 했다.

시위가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는 느낌

안식교는 특히 비폭력이고 무저항주의라는데

엉겁결에 이러고 있구나.

스스로에게 변명거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변명거리를 자신에게 확신 시키며 그래 이건 아니야 라고.......

버스에서 내려 지나가는 버스들을 바라봤다

비장감이 감도는 모습으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며칠 후 그런 버스들이 군용차에 쫒기고 쫒기는 모습이 종종 보였고 여기저기 흉한 몰골로 처 박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땐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참혹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주위의 누구네 형님 삼촌 가족들이 죽고 다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군부독재자들의 탄압과 감시 속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난 아랑곳하지 않고 편하게 살아 왔다.

난 항상 그런 쉬운 길을 가고 있다.

그날 주먹밥을 준비해 주셨던 분들에게도 떡을 준비해주셨던 부녀회에도 음료수를 상자째 올려주시고 미안하여 빵을 올려 주신 분에게 따뜻한 잠자리와 김밥을 준비해주셨던 분들에게 빚진 마음이다.

그날 비장감을 갖고 시위를 하던 분들에게 빚진 자이고 고귀한 생명 스러져간 분들에게 한없이 빚진 자다.

광화문 광장을 가면 1000여일을 한댓 잠자며 고생하는 분들에게 빚진 자이고

새벽이슬처럼 맑고 깨끗한 어린 영혼들이 차디찬 물속 스러진 것에는 눈물로 빚진 자다.

하나 나는 송박영신 집회에 참석하며 여전히 약삭빠르고 자기합리화에 능한 모습입니다.

역시 오후 5시 광화문에 도착한다.

어쩐 일로 광화문에서 전철이 정차를 한다.

항상 종로 3가역에서 미리 내려 걸어가야 했는데.

아마도 본집회가 7시라서 그런 모양이다.

저녁도 먹지 않고 꼬박꼬박 참석하면서 빵한조각 사과 하나로 때우고는 했는데 오늘은 그마져도 점심을 과식한 느낌이라 건너뛰었는데

시위 현장에서 추우면 따끈한 어묵 하나쯤은 먹는 호사를 연상하며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이순신 동상 앞으로 뚫린 통로에 나오자마자 광장을 가득 매운 촛불 문화제에 참가자들이 질서 있게 앉아 있다.

오호 오늘은 앉아서 편하게 참가 할 수 있겠다.

장애인 차별금지를 서명하고 박근혜 구속하라 표지하나 받고 그동안은 촛불이 의미가 있을 거 같아서 촛불을 준비했는데 오늘은 led촛불을 들었다.

땅에 앉으니 찬기가 금세 엉덩이를 타고 올라온다.

춥기는 참 춥다.

박근혜는 내려와라!

황교안도 내려와라

재벌들도 한패거리다!

지금당장 탄핵 인용하라!

구호가 외쳐지고

시민들이 발언을 한다.

3분 만에 잘 끝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3분이 지났으니 힘찬 함성으로 격려해 달라는 자막이 뜨고

주장도 가지가지고 면면도 가지각색이다.

바로 앞에는 초등생 남자아이가 코끝에 콧물이 맺혀 추위를 짐작한다.

이거 점점 추워진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왔나보다.

배도 고프고 오줌도 마렵다.

어떻게 버티다 보니 7시는 되었는데 무릎이 시려워 고통스럽다.

옆에 어여쁜 여자(내가 나일 먹었나)애가 바카스를 권한다.

감사하다 인사하고 받는데 옆으로 앞으로 바카스 박스가 건너지고 서로 권하고 있다.

내가 돈 주고 는 절대 안 사먹는 음료이지만 준비한 성의가 고마워 마신다.

추운데 찬걸. 마셔서 그런지 더 춥고 오줌은 더 마렵다.

아까 그 아가씨가 이번엔 핫백을 건네준다.

오! 이런 작은 팩하나가 추위에 이렇게 요긴하다니!!!!!

이번에도 옆으로 옆으로 핫백이 건네지고 있다

시린 무릎에 대고 비비고 얼굴에도 비비고 이젠 나도 가끔은 핫백을 사서 애용해야겠다.

하지만 추위에 아까 마신 바카스 때문인지 오줌이 마려워 이젠 이만큼 참석한 걸로 하고 집으로 가자

엉덩이를 들고 양해를 구하며 나서는데

아뿔싸, 이걸 어쩌나 밀집된 군중을 뚫고 나가기가 너무 힘들다.

어렵게 참 어렵게 군중을 뚫고 빠져 나왔다 싶은데 또 다른 군중이 앞을 막고 다시 바카스 한 병 받고는 군중사이를 헤치고 나오며 미안하다며 나이든 어른에게 그 바카스를 내밀며 겨우 빠져나왔다.

화장실 호아자앙시일~~~

찾아라.~~~

두리번두리번 그런 급한 상황 속에서도 나의 머리는 또다시 약은 아니 합리화 변명거리를 만든다.

기왕 나왔으니 내일 일하는 나는 아무래도 지금 여기서 집으로 가는 것이 …….

그래 종각역으로 가자 역에서 볼일도 보고 전철타고 집으로…….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

그런데 역까지 가기엔 무리다 너무 급하다.

옆을 보니 건물 문이 열려있고 공동 화장실이 있음직하다.

거기엔 나와 같은 상황인 분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서서 거길 주무르고 발을 동동 구르며 참고 참는다.

와~~~~

정말 이렇게 많은 양이 담겨 있었다니.

그래 이제 기왕 나섰으니 집으로 갈까?

발걸음이 종각 역 으로 향하다가

아냐 오늘은 신 대철과 진인권이 아름다운 강산을 콘서트한다고 했는데

에이 내가 언제 유행가에 그리 심취했다고

아냐

그런데 아까 앞쪽 콧물 흐르면서도 참고 견디던 초등생이 아른거린다.

어여쁜 아가씨 바카스를 준비하신 아주머니 핫백을 준비한 사람들이 .............

뭐 내가 언제 남을 의식하며 배려했다고…….

아냐 오늘은 콘서트를 봐야할 의무가 있어.

약삭빠르고 항상 의뭉스러운 합리화에 능한 나는 스스로 콘서트를 핑계로 발길을 광화문으로 돌린다.

어~~~~

수많은 촛불 문화제 참가자들로 광장은 가득 차있다.

그렇다면 광장 쪽이 아니라도 건물 갓으로 겨우 조금씩 움직이는 사람들을 따라 가본다.

아 배고파~~~~

음 그때 비좁은 곳에서 미리 자리 잡은 노점상들의 길거리 음식이 보인다.

마침 옆에 가래떡을 구워 팔고 있다

“얼마죠”

“2개 천원입니다”

허 우리 동내는 4개에 천원인데…….

지나친다.

나이든 여자 분이 떡을 들어 한번 뒤집어 놓는다.

잠깐의 망설이며 지나치니 다시 군중에 밀린다.

에이 계산이 빠른 나는 다른 이보다 장사를 못하는 아주머니를 지나친 것이 못네 아쉽다

팔아줄걸 조금 더 가니 어묵을 판다. 우선 하나 들었다

모둠오뎅이다.

간장을 찍어 한입 베어 문다 따뜻함이 목을 넘어가니 기분이 참 좋다.

국물도 한 모금 한다.

“얼맙니까?”

“2천원입니다.”

천원에 2개라 비싸다며 지나친 내가 2천 원짜리를 먹었군.

자꾸 아까 지나왔던 곳을 본다.

군중 때문에 다시 돌아가 가래떡을 사기는 어렵게 되었다.

괜히 물어는 봐서 미안한 맘이 가시질 않는다.

에이 내가 언제 남의 사정 봐주고 사는 놈이라고

평시는 이러지 않는데 아마도 이런 자리라 더 그런 사치적이 감상이 드나보다.

뮤지컬 그룹이 나와서 뮤지컬도 하고 노래도 한다. 중간 중간 시민 발언이 이어지고

드디어 전 인권과 신 대철이 무대에 오른다.

어딘가 덜 떨어진 듯 어벙한 말투의 전인권이

급조하느라 밴드의 구성원들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지 수첩을 들고 어리바리하게 소개를 한다.

준비를 1주일 만에 했다는데 어련할까?

신 대철이 매끄럽지 못한 멘트를 한마디 한다.

힘드신 여러분이 이 공연으로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셨으면 한단다.

아~~~~~~~~~~

아!!!!!!!

드디어 콘서트가 시작된다.

구성진 대금이 울려 퍼지고

전인권의 덜 떨어진 표정으로 하늘은 파랗게 강물도 파랗게~~~~~

오~~~~~

감동이 울려 퍼진다.

할렐루야 합창을 들으면 느꼈던 전율이

이런 하찮은 유행가를 들으면서 느껴지다니.........

위로

그래 위로가 된다.

노랫말이 너무 아름답다.

손잡고 가보자

네가 있고 내가있다

힘들어도 이 아름다운 강산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으니 달려가 보자 새로운 희망을 위해서

갑자기 눈물이 나온다.

 

 https://youtu.be/iZSCY3Gdl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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