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한 목사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벗어났기에 어쨌든 구원은 받는가?

by 한빛 posted Sep 17, 2016 Replies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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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위 성경절을 근거로 예수 믿고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은

십계명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에서도 벗어났다고 하면서

심지어 십계명의 폐지를 주장하거나,

십계의 폐지까지는 아니어도 "우리는 죄로 연약하여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어떤 이는 위 성경절을 근거로 하여

"우리 육신의 DNA는 어차피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으며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에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으니 그 예수를 믿는 자는 율법을 범하는 삶을

살아도 어쨌든 은혜로 구원은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주장들을 정리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율법(십계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율법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 뿐 아니라,

인간은 육신이 약하여 절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고

그 율법을 범하는 삶을 살아도 정죄가 없기 때문에

어차피 구원은 받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로마서 7:6의 말씀이 그런 의미일까요?

위 성경절에 대한 진의(眞意)를 살피기 전에

나는 그렇게 주장하는 분들에게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습니다.

 

최근에 개신교회의 몇 목사들의 여성도 성폭행과

성추행 사건이 보도 되면서 교회 안의 성직자들의

심각한 성적 문란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경남 창원의 60대 현직 목사가 20대 여자 성도들을 성추행하고

서울의 지구촌 교회 김아무개 목사는 최근 한 여집사를

자신의 차 등에서 성추행하여 곧 수사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여성도를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한 현직 목사들이

오직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에서 벗어나 정죄가 없을까요?

이들이 구원  받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요?

만약 이들의 행위가 죄가 되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이들의 행위가 무엇을 근거로 죄가 되는 것인가요?

 

간음해도, 도적질해도, 사기쳐도, 거짓말을 밥먹듯 해도

여전히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인가요? .......

 

이 말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신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범해도) 구원 받느냐는

질문과도 똑같은 질문입니다.

설마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우상은 섬겨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지만 안식일은 범해도 구원과 관계 없다고 하진 않겠지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위 성경절에서 “의문”(율법 조문)은 무엇일까요?

로마서 7장 6절의 ‘의문’은 헬라어로 ‘그람마토스’(grammatos)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의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고후 3:6-7)라고 할 때 그 ‘의문’과 똑같은 원어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이나 고린도후서 3장의 ‘의문’은
에베소서의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 2:15)라고 할 때 그 의문과는 다릅니다.

에베소서의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의 의문이란 말은
헬라어로 도그마(dogma)인데 그것은 율법의 규례들,
즉 각종 의문(儀文)의 조문들 즉 각종 제사법과 절기들의 조문들을 의미합니다.


골로새서의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4)라는 구절에서의 의문도 바로 도그마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의 ‘의문’은 모세의 율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폐하여 버린 것들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이나 고린도후서 3장의 의문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그람마”인데 이 “그람마”(γραμμα : gramma)는
'쓰다, 기록하다'라는 뜻의 “그라포”(γραφω : grapho)에서
유래된 중성 명사형 단어입니다.
따라서 그람마는 글과 기록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을 뜻 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글자’ 혹은 ‘문자’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7장의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한다’는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많은 분들은 이 구절 앞에 “율법에서 벗어났으니”라는 구절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율법이 폐함으로 율법에서 벗어났고
그래서 안식일을 안 지켜도 된다는 논리를 펴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치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한다'는 폐하여진 안식일과 같은 율법으로
아니하고 '영의 새로운 것'은 새계명을 뜻한다고 보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성경의 좌우를 살피지 않은 얼토당치도 않은 억설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성경절 다음 구절인 로마서 7장 7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라는 말씀으로
결코 율법이 폐해질 수 없으며 그 율법이 곧 십계명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결코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같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에 대해 명확히 정의를 합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롬 7:16)
또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과 그러기 때문에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며 의문의 무거운 것으로 아니한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똑같은 그람마(의문)가 사용된
고린도후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 3:6-9)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정죄의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수로 쓰셔서 주신 돌비 십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 '직분'이란 말의 헬라어는 "디아코니아"입니다.
디아코니아는 '직무, 사명, 직임, 직책'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문의 직분 곧 정죄의 직분이란 '글자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이 돌비에 쓰신 십계명 글자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십계에 기록된 율법의 글자 곧 그람마의 직분(역할)은
우리를 정죄하고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뒤에 “정죄의 직분”이라고 한 것입니다.

십계명에 기록된 글자는 우리에게는 거울의 역할을 합니다.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약 1:23-25)

거울은 우리의 생김새를 그대로 보여주고 우리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옷매무새가 어떤지를 정확히 보여주듯,
하나님의 십계명의 글자의 거울은 죄 많은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어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해 주는
정죄의 직분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롬 7:7)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9-10)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내면적 고심과 갈등이 표출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거룩하고 의롭고 신령한 율법의 거울 앞에 서면 우리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사도 바울처럼 절감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하여
우리를 정죄하는 직분을 가진 율법이 나쁜 것이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7:7)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죄가 많은 우리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앞에 설 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일 뿐이며
그 율법을 통해 정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거울이 우리의 얼굴에 묻은 더러운 것을 보여 주긴하지만
절대로 거울이 우리 얼굴의 더러운 것을 닦아 주지는 못하는 것처럼,
십계명의 율법은 신령하고 의롭고 거룩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거나 우리 죄인들을 의롭게 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울이 우리 얼굴에 묻은 것을 보여 주므로 닦아야 할 필요을
느끼게 해 주는 것처럼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함으로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함을 느끼게 해 주는 '몽학 선생'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우리 죄인들에게 유일한 소망은 오직 주 에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선언합니다.

율법 앞에 죄인인 우리의 소망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그리스도 예수 안에 믿음으로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간증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율법의 의무에서 벗어났다”가 아니라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의 문자 곧 정죄에 얽매여 사는 자가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 즉 그 정죄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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