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전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와 야베스의 기도

by 아기자기 posted Feb 27, 2017 Replies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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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에 '고전 거꾸로 읽기'가 한창 유행 했었다. 그 전까지는 대부분이 학교나 가정에서 배운 대로 전해 내려오는 고전 이야기를 전해주는 교훈의 틀에 맞추어 주어진 정답을 찾듯이 읽었고, 항상 그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불변의 정답 마냥 늘 정해져 있었다. 그 교훈이라는 것은 이조시대부터 일제시대, 그리고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권력자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유교의 탈을 쓴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포장되었다. 그런 일부의 고전들을 통해 왜곡된 충성, 효행, 열행를 고취시켜 기득세력의 권력과 권위를 확고히 하는 기본 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70년대 초 유신독재의 정점에서의 저항이 정치.사회적으로 분출될 때 문학에서도 그 지적 저항의 일부분이 '고전 거꾸로 읽기'로 표출되었다. 이는 기존의 고정관념화 되고 강요된 윤리 의식의 재점검이며, 이전까지 의심 없이 당연한 걸로 받아들이던 평가의 척도를 깨는 파격(破格)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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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사회적 가치관과 인식의 변화로 지금은 널리 알려진, 니체의 해체의 망치질이며, Thomas Kuhn의 'Paradigm shift, 페러다임의 전환'이고, Viktor B. Shklovsky(스틀롭스키)의 'Defamiliarization, 낯설게 하기'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확립된 기존의 평가의 틀 안에 이질적 기준을 밀어 넣는 것이고, 이전까지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 안에 다른 생각을 밀어 넣는 것이며, 또한 기존의 사물이나 생각들이 들어서 있는 자리들을 흩어서 새로운 분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귀와 눈과 머리에 익숙해진 '낯익은' 모습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감추어진 '낯설은'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기존의 격을 깨는 '파격(破格)', '페러다임의 전환', '낯설게 하기'는 기존의 고정된 관념과 사상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사상이나 예술의 시작을 알리는 창작의 기본 요소이다. 이는 창작뿐 아니라 독해(讀解)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로인해 철학에는 새로운 사상을, 미술에서는 새로운 화법을, 사진에서는 새로운 구도를, 과학에서는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그리고 종교에서는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기존의 전통과 상식이 대신 생각해 주기를 멈출 때, 사물을 보는 익숙한 틀을 벗어난 것들과 만날 때, 그 틀이 와해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파격의 고전 읽기> 이진경) 이는 고전 문학이나 예술 또는 철학에서 뿐만이 아니라 성경 읽기(신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한 개인이나 사회를 한 단계 성숙한 구성원이나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꼭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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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예로서, 심청전은 '효행(孝行)'의 교과서로 불릴만한 한국의 고전이다. 앞을 못 보는 부친을 향한 딸 심청의 목숨을 내어 놓는 효심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어려서부터 최고의 효행으로 배웠을 것이다. 지금도 곡성에서는 매년 심청 축제가 열리고, 백령도에서는 심청의 '효비(孝碑)'가 설치되어 있다.

 

자, 그러면 <심청전>의 'Paradigm shift', '낯설게 하기'의 '파격'은 다음의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딸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신을 바다에 던져질 제물로 몸을 판다면 그것을 "효도"라할 수 있을까? 자식의 목숨과 바꾸어 눈을 뜬다(병을 낫는다)해서 "효"를 느끼는 부모가 있을까? 그런 일을 당한 부모는 행복할까? 불행할까? 그것은 오히려 불효 아닐까? 진정 '효'의 최대치를 위해서라면 죽지 않고 해결을 해야 진정한 '효'아닐까? 심청의 '효행'이 목숨을 바칠만한 절대적인 (칸트의 '정언명령'적) 가치인가? 아니면 오히려 엽기적이고 잔인한 반인륜적인 행동 아닌가? 과연 이것이 누구에게나 장려할만한 "효행(孝行)"인가? 하는 점이다.

 

"심청은 왜 부친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부친을 말할 수 없이 큰 불행에 빠트려야 했을까?" -<심청전에 나타난 비장과 골계> 조동일, 1999-

효를 위해 불효를 하는 심청의 이런 '효이기를 중단한 효'라는 이율배반적인 선택의 이야기는 왜 쓰여 졌고 장려되어 왔을까?

 

"'효'라는 도덕적 목적을 위해 '죽음'이나 '인신매매'라는 비도덕적 방법을 선택하는 '효로써 효를 상하게 하는 도덕적 딜레마'가 발생한다. -<효녀 심청의 서사적 탄생과 도덕적 딜레마> 최기숙, 2003-

 

이런 이율배반이나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쓰여지고 널리 읽히도록 장려한 것은 당대의 지배층(성인 남성 권력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이율배반을 절대복종의 미덕으로 미화시키고, 도덕적 딜레마를 삼강오륜으로 포장하여 미화시키려는 기만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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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는 성경 읽기에도 동일한 면이 있다. 신의 가면을 쓰고 불의와 차별에도 절대복종을 강요하는 남성 성직자들의 그 신의 뜻과 이율배반적인 독선적 성서해석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이율배반과 도덕적 딜레마는 다른 외적 요소로 포장해도 결코 해소되지 않고, 단지 은폐될 뿐이다.

 

다음 질문은 눈 뜬다는 보장도 없는데 목숨을 바쳐야 하는 무조건적인 효행과 허벅지 살을 베어 고깃국을 끓이고, 손가락을 잘라 뼈를 고아 바치는 엽기적인 효행, 그리고 죽은 남편에게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을 매어 죽은 며느리를 기리는 열녀비를 세워 장려하는 -<삼강행실도>, 이런 잔인하고 엽기적이며 부당하고 반인륜적인 잘못된 사회 통념의 이야기가 과연 고전 저자들의 원래의 저술 의도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성경의 경우는 어떠한지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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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의도적으로 숨겨 논, 또는 작가가 부여하지 않은 의미를 읽어 내는 독서 방법을 루이 알튀세르(Althussr / Balibar, <자본론을 읽다> 1991)는 '징후적 독해, Symtomatic reading'라 부르고 그 필요성을 강조했다.

 

"증상 이면에 감추어진 상처(trauma)'같은 중심의 의미를 찾아내어 이미 정량화된 이론이나 해석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역설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독해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페러다임의 전환이나 '낯설게 하기'와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또한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마13:34)던 예수의 화법에 대한 독법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보는 심청전의 이율배반적인 이야기 뒤에 숨어있는 (작가가 의도하고 숨겼던지, 아니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지) 의미를 찾아보면 이 딜레마를 푸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심청은 자신을 수양딸로 삼겠다며 쌀 300석을 내어 주겠다는 승상부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부모를 위해 공을 드릴 양이면 어찌 남의 명분 없는 재물을 바라며, 쌀 300석을 도로 내어주면 뱃사람들 일이 낭패이니 그 또한 어렵고, 남에게 몸을 허락하여 약속을 정한 뒤에 다시 약속을 어기는 것은 못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니 그 말씀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심청전, 완판본> 정하역 역주- 하며 거절했다. 사실 뱃사람과의 약속 때문에 양녀로 삼겠다는 승상부인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진행이다.

 

이런 일면 억지스러워 보이는 진행은 어쩌면 심청이 죽음으로 항변하는 당대의 '효'에 대한 부당한 반인륜적 사회적 통념에 대한 고발이 이 소설의 감추어진 의도 아닐까 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청이 인당수의 심연으로 가지고 뛰어 들었던 것은 당대의 부당하게 강요당하던 부조리한 가치관의 절단이고 고발 아닐까? <파격의 고전> 이진경, 2016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인당수에 뛰어든 심청의 행위에서 그리스인으로의 거듭남을 선언하는 침례와의 유사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거듭나기 위해 물에 잠기는 침례는 과거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강요하던 부조리하고 이기적인 가치관의 절단이며 고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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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연꽃 속으로 부활한 심청이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가지 않고 왕에게 시집을 간 이유이다. 징후적 독해법의 새로운 시각으로 보면 부활한 심청이 과거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과거의 잘못된 관습과 가치관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잡고자하는 강력한 메시지 아닐까? 이는 침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돌아가야 하는 곳은 과거의 고정관념과 가치관이 아니라, 새로운 관습과 법칙이 적용되는 그리스도의 신부의 신분으로 살아야 하는 것과 같은 지점이리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수 천 년 동안 남성 성직자들이 해석하고 만들어 전해준 '무조건 복종하라'의 이율배반적인 전통과 왜곡된 문자주의, 근본주의, 율법주의에 물음표를 던지고 물속에 수장시킴으로 강요된 맹종에서 벗어나, 직접 왕과 대화하며 올바른 하나님의 섭리를 찾고 진리 안에서 사는 새로운 삶일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수 천 년 전에 굳어 화석화된 죽은 말씀이 아니라, 비로소 오늘 바로 지금 나에게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이 될 것이다!

 

사실 부모님의 은혜란 쉽게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돌아가신 부모님이 다시 살아 돌아오신다 해도 말이다. 나의 모든 시간과 재물을 내어 놓고 내 목숨과 허벅지 살과 손가락을 삶는다할지라도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한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방법이 딱 하나가 있다. 그것은 부모님께 받은 은혜만큼, 내 자신이 올바로 살고 내 자녀들에게 올바르게 살도록 잘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내 자녀나 내 가족 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에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 이외에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다른 길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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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유일한 방법도 마찬가지 아닐까? 받은 (달란트) 만큼, 깨달은 (분량) 만큼 내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올바로 살고, 내 자녀와 가족과 이웃 그리고 역량이 되는 데로 타인과 원수에게도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극히 작은 자에게 나누고 사랑하는 것이다. 베고픈 이를 만나면 먹이고, 목마른 이에게 마시게 하고, 헐벗은 이를 입히며, 갇힌 이에게 자유를 찾아 주기 위해 같이 싸우고 그 고난에 동참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약자인 지극히 작은 자가 곧 예수요, 그들에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25: 31-46)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은혜 갚는 법이고 '예수의 사랑법' 아니겠는가? 또한 이것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며, 생명의 삶이고, 영생의 길이 될 것이다. '야베스의 기도'처럼 내 가족, 내 이웃뿐 만이 아니라, 남의 이웃과 원수 된 이들에게까지 사랑의 지경을 멀리 넓히고, '오병이어의 나눔의 기적'을 이 땅에서 누리는 거듭난 심청이의 삶, 성령 충만한 생명의 삶을 사시길 기원한다.

 

심청이가 바다에 빠져 목숨을 바쳐서도 단 한 명의 부친인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할 수 없었지만, 거듭난 새로운 신분으로 전국의 모든 장님들을 잔치에 초대하고 같이 나눌 때, 드디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 모두를 먹인 것같이 모두의 눈을 뜨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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