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를 키우며 신기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강아지는 똥을 잘 눈다는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강아지를 아침저녁으로 데리고 나가면 대부분 한 번 혹은 두 번 똥을 누는 것이다.
메깔쓰럽게 궁둥이를 움츠리며 이리저리 자리를 찾으며 몸을 뱅글뱅글 돌리다
똥을 찍 누고는 으레 똥을 치우는 나를 향해 뒤 발질로 흙을 파헤쳐 퍼부으며 세리머니를 하는 것이다.
그만해 이 x xx 야!
하루에 두 번 그것도 매번 성공하며 기분 좋아 날뛰는 강아지는
평생 변비로 고생하며 화장실에 앉아 매번 눌 때마다 피를 흘리며 이를 악무는 나에게 부럽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수십년 고생하다 어느 날 한 방법을 터득하게 되어 똥 누는 시간을 줄이게 된 일이 있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똥들은 자갈처럼 엉겨 붙어서 홍문에서 나오지 않는데
우연히 홍문 주위를 손으로 만져보니 딱딱한 것들이 만져져서 홍문 주위를 이리저리 누르니
신기하게도 막힌 똥을 조금 쉽게 밖으로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때도 여전히 피를 보게 되지만 그래도 앉아 마냥 기다리던 예전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평소 신앙심이 깊은 B 집사 집에서 성도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우연히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말문과 함께 밥 먹는 잊고 그를 자세히 쳐다보게 되었다.
OMG!!
그는 하루에 세 번을 눈다는 것이다. 세 번, 아니 세 번이라니?
일주일에 한 번 아니면 두 번, 그리고 눌 때마다 힘들며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하루에 세 번을 눌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이 절로 나온 것이 아니다.
사실 먹는 것이 복이라는 것,
그보다 누는 것이 더 복이 있다는 것은
잘 먹고 잘 누는 사람은 모르는 일이다.
신심이 깊은 집사가 세 번이라면 장로들은 몇 번을 눈다는 말인가
남이 누리는 복을 나는 왜 누리지 못하는지 원망이나 후회는 없다.
병원에서는 밑으로 못 누고 옆으로 누거나
긴 줄을 홍문에 넣어 늘 다 함께 냄새를 공유해야 하는 분들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가끔은 나도 똥을 시원하게 눌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거의 색깔이 황금색에 가깝다.
나는 결코 세 번을 바라지는 않지만
피를 보지 않고 황금색에 가까운 똥을
조금 더 자주 싸도록 노력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