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고픈 '조사심판' 이 어떤 것인가

by 전용근 posted Oct 20, 2016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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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을 건너는 놀라운 기적은 구속사적 중대한 사건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먼저 홍해의 사건은 과거의 죄에 매어 종살이 하던 옛 생활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물로 침례를 받아 새롭게 탄생하는 중생을 경험하게 되는 사건이다, 

 

반면에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은 지상에서 생활로 비유되는 광야 40년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는 완전한 성결함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는 과정이다. 

400년간 애급에서 노예로 종살이 하던 속박된 죄인의 신세에서 

모세의 인도로 출애급하여 홍해를 건널 때에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천국)’ 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겪는 광야의 생활을 체험하는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광야에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으로 연단된 훈련으로 성화의 과정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전한 상태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생을 경험하는 두 가지 영적 경험을 겪게 된다. 

 

내가 언급하고픈 대목은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출애급과 홍해를 건너는 순간 

그들은 ‘노예에서 해방’된 다시 말하면 ‘죄에서 구속’된 ‘의인’의 신분으로 

중생의 기쁨을 누리고 살아 가는 특권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에는 고난의 행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애급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고달픈 광야의 여정에서 만나와 반석에서 물,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보호와 동행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로 향한다. 

 

마침내 요단강에 이르러 명하신 대로 언약궤를 메고 물을 딛을 때 

흐르는 물이 멈추고 마른 땅으로 건너는 장면은 

출애급하여 40년전에 선친들이 경험한 기적을 그들도 체험한다. 

여기에서 그들의 오랜 장정은 마치고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입성한다.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급의 역사는 

지금 살아있는 우리 자신이 현대판 이스라엘 백성으로 

우리는 ‘아직도 완전한 속죄가 안 이루진 상태 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복지에서 순결하고 

행복스러운 백성으로 만드시려고 출애급하여 훈련의 과정을 받게 하셨다’ 

그들이 광야의 생활에서도 반역과 부절제 와 우상숭배하는 배도된 행동을 

저질럿을 지라고 그들을 ‘나의 백성’으로 이끄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한번도 ‘애급의 노예’ 로 취급하지 않으셨다. 

 

처음 나온 무리들은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죽어 장사 되였다. 

우리는 다 용서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어쩌면 지금은 우리가 다 요단강가에서 젓과 꿀이 흐르는 강 건너편 

가나안 복지 천국을 눈 앞에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의 임무를 마치고 나오셔서 

재림 하시는 시기에 살고 있는데 아직도 천국에 입성할 자녀들의 

신분(ID)을 체크 하고 계실까? 

 

이 놈이 아직도 애급인 노예의 신분인가 아니면 

홍해를 건너온 내가 약속한 자식인가’하고. 

이렇게 이해하면 아직도 ‘조사심판’이란 검문소에서 무슨 신분 증명서를 보여야 하나.

‘ 다 이뤘다 .무죄 함 , 십자가 보혈로 ‘ 라고 인증된 ID만 있으면 안 되는가. 

요단강에 이르러서 그냥 ‘건너기만 하면 가나안이야’ 아닌가 

또 무슨 죄에서 속죄된 ID가 왜 필요 한가.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이해 할 것은 광야에서 죽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의 노예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으로 죽었다

그들의 구원의 판결은 그들을 잘 아시는 하나님의 몫이다. 

 

쉽게 말하면 어떤이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죄인으로 멸망 하고 

다른이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의인으로 구원 받게 될 것 같다. 

이것이 자비와 공의를 표방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 이다

 

신약의 탕자의 비유에서 그 예를 잘 보여 준다.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길 때에는 

그의 신분은 탕자 가 아니라 으젓한 아들이다. 

그가 다시 아들의 신분으로 돌아와서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았는지는 

기록에 없어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는 아들의 신분으로 살다가 죽었으면 그는 아들로 죽은 것이다. 

효자인지 불효자인지는 다른 얘기이다. 

 

조사심판’이 이 시점에서 아직도 속죄를 마치는 마지막 과제라면 

이 것은 마치 위에 언급한 이스라엘 백성의 신분을 재차 확인하는 

절차로 오해 될 수 있다.

 

출애급 과정과 가나안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어떠한 과정을 겪었는지를 

살펴보면 어떨까?

 

이제 우리는 요단강 앞에서 신분을 체크하는 

검문소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40년전 ‘애급에서 나오자’라고 

외 치는 모세는 없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언약궤’(약속)의 행진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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