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스다가 노골적인 율법주의를 벗어난 것은 1888년인데
한국 스다는 그 망령에서 벗어나는데 무려 그로부터 100년이나 걸렸다.
내 소시적 스다에 만연한 구원관은 딱 이거였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죄의 유혹을 받았으나 이기셨고, 죄를 짓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를 닮아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으며, 그리 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즉 행위구원론이었다는 이야기다.
하늘에 가져갈 수 있는것은 품성 뿐이라는 해괴망측한 완전론은 덤이었다.
1988년 모리스 벤덴인가가 지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책을 사경회 교재로 채택하면서부터
비로소 한국 스다는 [표면적으로는] 율법주의를 벗어나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러나 그것은 제스쳐였을뿐.
아직도 스다에는 율법주의, 행위구원론이 판을 친다.
완전한 품성을 이뤄야만 하늘 간다는데
나는 참 의문이다.
연합회장부터 시작해서 합회장, 신학교수들, 일선 목회자들...
소위 지도급 인사들 중에 완전한 품성을 이루고 죽은 사람 좀 꼽아줘봐라.
아무도 없지?
내가 개인적으로 조금 친분있는 사람들 아무리 뒤져봐도 그런 사람 없다.
율법주의적 구원관으로 보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는건데
죽자고 그걸 고수하는걸 보면
자기 자신도 구원받기 싫다는건지
도통 알수가 없다.
"한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