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by 소나무 posted Jan 14, 2018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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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uther, The Bondage of the Will, translated by J.I.Jacker, Grand Rapids: Revel, 1957, p.220-222.

 

(x) That necessity does not involve compulsion: the case of Judas (720-722).

 

See how successfully the Diatribe retains freedom alongside necessity when it says: ‘Not all necessity excludes “free-will”. Thus, God the Father begets a Son of necessity; yet He begets Him willingly and freely, for He is not forced to do so.’ Are we now discussing compulsion and force? Have I not put on record in many books that I am talking about necessity of immutability? I know that the Father begets willingly, and that Judas betrayed Christ willingly. My point is that this act of will in Judas was certainly and infallibly bound to take place, if God foreknew it. That is to say (if my meaning is not yet grasped), I distinguish two necessities: one I call necessity of force, referring to action; the other I call necessity of infallibility, referring to time. Let him who hears me understand that I am speaking of the latter, not the former; that is, I am not discussing whether Judas became a traitor willingly or unwillingly, but whether it was infallibly bound to come to pass that Judas should willingly betray Christ at a time predetermined by God.

 

…..

....

....

 

….Necessity of consequence ensures that if God foreknows a thing, it necessarily takes place. This means that ‘free-will’ does not exist. Necessity of consequence is not obscure or ambiguous, and the doctors of all ages, blind though they may be, are yet compelled to acknowledge it, it is so palpably clear and certain. But the necessity of the thing consequent, with which they console themselves, is a mere phantom, diametrically opposed to necessity of consequence. For instance: it is necessity of consequence if I say, ‘God foreknows that Judas will be a traitor; therefore, it will certainly and infallibly come to pass that Judas will be a traitor.’ Against this necesiity of consequence you console yourself thus: ‘Because Judas can alter his purpose of being a traitor, therefore there is no necessity of the thing consequent.’ How, I ask you, will these two positions agree: ‘Judas can will not to betray’, and : ‘Judas must necessarily will to betray’? Are they not directly opposed and contradictory? He will not be compelled, you say, to betray against his will. What of that? You were speaking of the necessity of the thing consequent, and saying that it does not follow from necessity of consequence; you said nothing of the compulsion of the thing consequent. The point to which you were supposed to speak was the necessity of the thing consequent, and you propound an example concerning the compulsion of the thing consequent? I raise one question, you answer another! This comes of the sleepy-headedness which makes you overlook the futility of this fabrication about the necessity of the thing consequent.

 

 

두 가지 종류의 필연성 : 유다의 경우

 

그런데 강론은 자유와 필연성을 동시에 옹호하는 멋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필연성이라고 해서 이것이 자유 의지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성자를 낳지만 그러나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성자를 낳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부는 그렇게 하도록 강요받지 않기 때문이다(EAS 4:102) . 당신에게 물어보건대 지금 우리는 강제와 강요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미 불변의 필연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이 책의 곳곳에서 명백히 말해 오지 않았던가? 우리는 성부가 자신의 뜻에 따라 성자를 낳았으며 또 유다가 한 의지의 활동에 의해 그리스도를 배반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예지한 것이라면 이러한 의지의 욕구가 불가피하게 유다 자신 속에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두 가지 종류의 필연성을 가정해 보기로 하자. 첫째는 업적에 관한 강제의 필연성이고, 둘째는 시간에 관한 절대적인 필연성이다.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즉각 지금 내가 두 번째 경우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 우리는 유다가 자의로 배반자가 되었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정하신 어느 시점에서 유다가 그의 의지의 욕구에 의해 그리스도를 필연적으로 배반하게 되었는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강론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하자. 당신이 하나님의 무오류적 예지와 불변의 의지를 고찰한다면 유다는 필연적으로 배신자가 될 것 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유다는 자신의 의도를 바꿀 수도 있었다. 과연 강론은 자신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위에서 말한 대로 의지는 단지 악만을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제쳐두고라도 하나님의 예지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유다가 자기의 의지를 바꿀 수 있겠는가? 여기서 강론은 만사를 포기한다. 강론은 군기를 내팽개친 채 팔을 늘어뜨리고 전장을 떠나버린다. 그러면서 이 토론은 결과의 필연성과 결과 자체 안에 있는 필연성에 관한 스콜라 철학의 미묘한 논의와 관련이 되며, 자신은 이런 애매한 문제를 다루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사건을 법정으로 가지고 가 먼저 변호할 필요성이 생겼을 때, 당신 자신이 그 문제에 등을 돌리고 입장을 밝히거나 질문하는 일을 딴 사람에게 맡겨 버린다는 것은 확실히 신중한 일이기도 하다. 놀이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마르스 경기장에서 떠나야 한다는 속담에 따라 강론은 처음부터 이런 입장을 견지했어야 했고, 또 역시 글도 쓰지 말아야 했다. 하나님이 어떻게 확실하게 예지할 수 있는지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 관한 한 사물이 어떻게 우연하게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에라스무스가 해결할 수 있다고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도 않았었다. 이러한 난제는 강론보다 훨씬 이전부터 세상에 있어 왔었다. 그러나 우리는 에라스무스가 어느 정도의 답변을 하고 어느 정도의 규정을 내리리라고 예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비유적 해석을 사용하여 거기에 무지한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물러서게 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현재 말한 후 자신은 담쟁이 덩굴과 월계수의 관을 쓰고 유유히 혼잡한 재판정을 떠나버린다.

 

 

그러나 형제여, 사정은 결코 그렇지 않다. 어떤 미사 여구도 결코 정직한 양심을 속일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양심의 힘은 미사 여구의 힘과 재간보다도 더 강하다. 우리는 웅변가로 하여금 미사 여구로써 주제를 변화시키게 한다든지 현안 문제를 혼돈시키게 할 수 는 없다. 여기는 그런 속임수가 통할 자리가 아니다. 모든 존재의 고비와 문제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에는 선택의 자유가 완전히 제압당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철저히 승리를 거두느냐의 갈림길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자유의지에 대한 우리의 승리가 확실해지거나 아니면 그럴 위험이라도 있게 되면 즉각 우리가 한낱 궤변만을 늘어놓았다는 태도를 취한다. 과연 이것이 양심적인 신학자가 취해야 할 태도인가? 이렇게 청중을 마음 졸이게 하고 논쟁을 무질서와 혼돈 속으로 몰아 놓고서 당신은 과연 그 문제에 대해 심각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고 월계관을 쟁취한 것으로 인정받고 싶어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교활한 수법은 속세에나 통할 수 있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순수하고 숨김없는 진실을 추구하는 신학에서는 이것은 아주 해롭고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궤변론자들 역시 이 논증의 저항할 수 없고 꺾을 수 없는 힘을 느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결과의 필연성과 결과 자체 안에 있는 필연성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고안이 얼마나 쓸모 없는지는 우리가 위에서 충분히 되는 말도 매우 많이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결과의 필연성을 인정하면 자유의지가 사라지고 말거나 추락되고 결과 자체 안에 있는 필연성이나 혹은 우연성의 경우에도 자유 의지를 지지해 줄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강요 받지 않고 기꺼이 할 바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로서는 당신이 자유 의지가 스스로 기꺼이 할 바를 필연적으로 해야만 하며 또 하나님이 예지하지 않았을 경우 그 어떤 것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약 하나님이 유다가 배반자가 되거나 혹은 배반할 뜻을 버리리라는 것을 예지하셨다면 어느 것이든 그가 예지하시는 것은 사실로서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예지와 예언에 잘못이 있을 것이니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결과의 필연성에서 생기는 결과이다. , 하나님이 어떤 일을 예지할 경우 그 일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는 자유 의지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결과의 필연성은 애매하거나 불명료한 점이 전혀 없고 설사 모든 학자들이 눈이 멀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여 곧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 자체 안에 있는 필연성이란 그것으로 스스로를 자위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나의 현상일 뿐이며 결과의 필연성과는 완전히 배치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유다가 배반자가 되리라는 것을 하나님이 예지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일이 반드시 그리고 틀림없이 발생한다고 할 때 이것이 곧 결과의 필연성이다.

 

 

당신은 이러한 필연성과 결과의 문제에 부딪히면 유다가 배신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변경할 수 있기 때문에 결과 자체 안에 잇는 필연성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자위하려고 한다. 당신에게 묻거니와 유다가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할 수 있다는 진술과 유다가 배신자가 되리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는 진술이 어떻게 서로 조화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진술은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당신은 유다가 자신의 의지에 역행하면서까지 억지로 배신을 강요 받지는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위의 진술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당신은 결과 자체 안에 있는 필연성에 관해 말해 왔었다. 그리고 그것이 필연적으로 결과의 필연성에 의해 수반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결과 자체 안에 있는 강제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당신이 대답해야 될 것은 결과 자체 안에 있는 필연성인데 실제 대답한 것은 결과 자체 안에 있는 강제성에 관한 보기를 들었을 뿐이다. 당신은 지금 동문서답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신이 아직 반쯤만 깨어 있어서 결과 자체 안에 있는 필연성이라는 고안은 전혀 쓸모 없는 것임을 알지 못한 데서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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