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와 화초

by 소나무 posted Jan 14, 201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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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와 화초(1)

 

 

요즘 ‘정원’을 관리하는 것에 재미가 생겼습니다. ‘정원’이라고 해 봐야 뒷마당의 조그만 빈터에 어수선하게 자라고 있는 잡초들을 뽑아주기도 하고, 화단을 만들어주기도 하는 등 말 그대로 별 것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삶의 여유가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지만, 여유가 있기를 소망해 보는 마음 때문에 ‘정원’관리를 시작했습니다. 책상 앞의 유리창으로 통해서 항상 바라다 보이니, 손질해 볼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잡초를 뽑아주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잡초를 이렇게 뽑아주어야 하는 것일까? 잡초는 생명이 아닌가? 잡초는 아름답지 아니한가? 측은한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잔디가 자랄 수 있는 영역을 분할하고, 또한 잔디가 마음껏 번식해 갈 수 있는 영역도 나눠놓았습니다. 줄을 그어서는 여기까지는 잔디, 여기까지는 잡초 하는 식으로 각자가 자랄 수 있는 곳을 표시해 놓은 것입니다. 물론, 화초가 자랄 수 있는 곳도 할당해 두고는 그곳에 장미 몇 그루도 심었습니다. ‘장미의 정원’을 꿈꾸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생각이 또 번졌습니다. 왜 잡초를 잡초라 하고, 화초를 화초라 부르게 된 것일까? 물론 잡초나 화초란 말이 한자어이기 때문에 이 한자말의 어원을 따져 보아야 할것이고, 신라 이두의 원래 발음도 추적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연구는 사실상 어원론적 연구입니다. 하지만, 저의 관심은 그것보다는 의미론적인 관심이었습니다. 언어 자체가 도대체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담에게 주어진 첫번째 과제가 바로 ‘분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바로 ‘분류’의 행위였고, ‘과학’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분류의 기준이 무엇이었겠느냐는 것이지요.

 

비트켄슈타인이란 현대언어분석철학자는 언어의 기원은 ‘용례’(Usage)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렇게나 우발적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공동체적 필요에 의해서 언어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언어발생에 대한 이론들에서 진일보했음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language family(어족)나, language game(언어게임)이란 개념을 발전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그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서 발생하였다는 것은, 그 공동체의 ‘임의’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것과는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화초가 화초라 불리는 것은, 잡초가 잡초라 불리는 것은, 이 잡초, 화초라는 말을 사용하는 한국사람들(혹은 중국사람들)의 의사소통의 필요에 의해서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셈이지요.

 

이것을 현대문예이론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바로 자크 데리다(J.Derrida)나 리챠드 로티(R. Rorty), 스탠리 피쉬(S.Fish) 등으로 대표되는 독자반응(Reader-Response)중심의 비평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단어의 발생만 아니라, 문장이나 텍스트 자체의 의미란 독자가 그것들을 읽어가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 그 문장, 그 단어, 그 텍스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이전의 입장인 저자중심(Author-Centered)의 비평이론에 대한 반발입니다. 이 반발에는 일종의 정당성이 없는 바가 아닙니다. 독자의 반응이 가지는 의미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독자의 반응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인해서, 저자(author)의 권위(authority)가 전혀 무시되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저자의 죽음’(death of author)를 선포했습니다. 마치 니이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한 것과 그 맥이 일통합니다. 바로 이것이 문예비평이론적인 측면에서 살펴본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현상입니다. 그래서 이제껏 무시되어 왔던 독자의 반응을 최우선시하게 되고, 지금껏 강조되어 왔던 저자를 죽여버리는, 가치의 전도가 전개된 것입니다. 잡초가 오히려 화초로 인정이 되고, 화초는 이제 그 영광의 자리를 물려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과연 화초를 왜 화초라고 하며 잡초는 왜 잡초인 것일까요? 이런 문제를 이 현대사조들과 더불어서 앞으로 몇 번 다룰려고 합니다. 정원을 다듬으면서 저는 지금 저의 생각의 정원을 다듬고 있습니다.

 

 

 

 

 

잡초와 화초(2)-잡초들의 반란

 

 

 얼마전 한국정가에 ‘잡초론’이 한창이었습니다. 노대통령이 이메일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는 중에 ‘잡초정치인’들에 대해서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잡초’라고 했느냐고 시비가 붙은 셈입니다. 실상 스스로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이 시비를 걸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의 ‘잡초와 화초’론은 정치적 시비가 아니고 철학적, 사상적, 그리고 신학적 시비입니다.

 

기득세력권을 일러 ‘화초’라 하고, 그 기득세력에 의해서 사회의 주변언저리로 물려난 계층을 ‘잡초’라고 할 수도 있고, 또한 사회의 주된 기둥역할을 해왔던 사상(예를 들면 기독교)을 ‘화초’라고 한다면, 주변에 밀려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이단시되어왔던 사상들을 ‘잡초’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누가 이렇게 ‘화초’를 ‘화초’라 하고, ‘잡초’를 ‘잡초’라 하였습니까? 과연 기독교가 ‘화초’이고 ‘이단사상’은 ‘잡초’인가요? 그래서 모든 ‘잡초’들은 다 뽑아버려야 할 대상이더란 말인가요?

 

문제의 발단은, ‘잡초’들이 반란을 도모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목소리를 모았습니다. ‘잡초’들이었던 노동자프롤레타리아트들이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잡초’라고 규정한 사람들은, ‘잡초들’ 스스로가 아니라, 바로 ‘화초’들의 권력계층에 의해서 저질러진 음모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화초’가 ‘화초’인 것은 오직 하나, 권력계층의 힘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힘을 꺾어버리고 대신 그 힘을 ‘잡초’가 차지하면, ‘잡초’는 이제 ‘잡초’가 아니라 ‘화초’가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잡초’들의 소리는 더욱 커져갔습니다. 프로이드의 무의식개념이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에 힘을 더해 주었고, 이제 문예비평이론들이나 해석학에서조차 그런 ‘잡초’들의 반란에 정교한 이론들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자크 데리다, 미셀 푸코, 롤랑 바르트 등의 이론가들이 입을 모아서 외쳤습니다. 세상의 ‘잡초’들이여 반항하라! 이 세상에 ‘잡초’들을 억눌렀던 ‘화초’란, 원래 아무 것도 아닌 것, 우리들의 관습에 의해서 존재한 것, 우리들의 마음에 있는 것, 그 모든 허상들을 깨부수고, ‘잡초’로서 굳건하라. 그리하면 너희들도 곧 화초가 되리니….선지자적 발언들을 하였더랬습니다.

 

이들의 말이 모두 잘못된 것들만은 아니었습니다. 실상, ‘화초’들의 독단주의, 전제주의, 그리고 그 교만과 허영은 너무나 꼴볼견이었습니다. 누가 자신들을 ‘화초’라 불러주었더란 말입니까? 그들은 그들에게 ‘화초’라 이름 붙여진 것이 자신들의 어떤 아름다움, 어떤 향기, 어떤 자태 때문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자기들의 모습을 ‘잡초’들에게 비교해 보니, 자기들의 생각이 옳은 것만 같았습니다. 화려한 자신들의 모습이 꼭 ‘잡초’들 ‘위’에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하고, ‘잡초’들의 피를 빨아 먹는 것이 당연한 자신들의 생리요, 우주의 질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잡초’들의 아픔과 고뇌에 대해서는 간혹의 동정심으로 자비를 베푸는 듯 여겼고, ‘화초’의 ‘화초됨’과 ‘잡초’의 ‘잡초됨’은 영구불변의 질서로 하나님이 부여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화초’들의 이 생각을 간파한 ‘잡초들’의 이론가들은 그 생각을 파괴시켜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들의 ‘신’이란 죽었다. 우리들에게는 신이 필요 없다. 우리 스스로 살아가겠다. 간섭하지 말아라.

 

 

 

 

잡초와 화초(3)-화초의 바벨론유수

 

 

교회권력과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흔히들 ‘바벨론유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북쪽이스라엘이 앗수르제국에 의해서 망하게 되고, 기어이는 남쪽 유다왕국이 그 당시의 제국이었던 바벨론에 의해서 망한 뒤, 그 공무원들, 귀족들이 거의 대부분 바벨론지역으로 포로되어 지냈던 70여년의 기간을 ‘바벨론 유수’라고 합니다.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던 유다왕국이 멸망당하게 된 것이나 포로생활한 것을 일러 말합니다. 세상사람들에 의해서 조롱을 당하고 손가락과 멸시를 당하는 것을 일러 말하기도 합니다. 종교개혁당시의 마틴 루터가 그 당시의 로마천주교에 의해서 왜곡되고 변질된 상태로 있었던 교회를 일러, ‘교회의 바벨론유수’라고 칭하였습니다. 최근세에 이르러서는 쟈크 엘룰이라는 평신도신학자가 현대문명에 의해서 포위당해 있는, 그리고 그 문화에 의해서 동화되어가는 교회의 모습을 ‘바벨론 유수’라고도 표현했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명예와 영광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탄식했었습니다. 교회에 머물렀던 하나님의 영광이 ‘이가봇’했다는 것입니다(삼상4:21).

 

잡초들에 의해서 그 권좌에서 물러나야했던 화초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왕관을 벗기우고, 화려한 옷들과 치장들은 모두 다 제거당했습니다. 심지어는 아랫도리만 아니라, 그 치부까지도 드러났습니다. 그 유방과 음부를 부끄러워 가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화초의 모습입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부끄러움이라도 알면 다행이겠습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주변의 외간남자들을 불러들여, 그 침실에서, 그 침대 위에서, 삯도 받지 않은 채로, 음탕한 신음소리를 흘리면서, 남자들과 혼음하고 있는 간부의 모습이 바로 현금 화초의 모습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데 그 손가락질 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뻔뻔스럽게도 값싼 향수냄새를 흘리면서, 게슴츠레한 눈길로 오히려 유혹의 시선을 던지고 있습니다. 수줍어함으로 오히려 더욱 아름다웠던, 아침이슬을 담뿍 머금고 태양아래에 고고한 자세로 세월을 음미하던 그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진골이라 알아볼만했던 모습또한 사라져 버렸습니다.

 

정원의 역사는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일까요? 세월은 흐르고, 잡초들의 기세는 여전히 등등하고, 오히려 더욱 강하여지기만 합니다. 이제 온 정원은 잡초들 천국이 될 듯도 싶습니다. 더욱 더 왕성하게 그 뿌리를 벋어가고, 그 뿌리와 잎새들 사이에서 숨을 죽이듯이 화초들은 허덕거리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바로 그 속에서, 화초들의 반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니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성하는 화초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하는 갈대’마냥, 생각하는 화초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각하다가, 자신의 잘못을 근본적으로 되짚어 보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돌아가게 된 것일까? 과연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로 갔는가? 이가봇된 그 영광을 어떻게 하면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것일까? 특별히 잡초들에 대해서 보여주었던 자신의 어린애같았던 치기들이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화초인 자신만이 절대의 진리와 가치를 가졌던 양, 잡초를 무시하고, 학대하고, 은연중에 자기의 아름다움에 젖어 뽐내었던 모습이 너무 유치하게만 여겨졌습니다. 자기의 하나님만이 절대의 하나님이고,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여기고, 잡초들의 하나님을 ‘우상’이라고 폄하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 하나님이란, 화초만을 만드신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잡초까지도 만드신 분이심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서쪽으로 보내신 분만이 아니라, 달마를 동쪽으로 가게 하신 분도 또한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노자,공자, 싣달타, 마호메트 속에서 역사하셔서, 나름대로의 제 몫을 역사 가운데서,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 가운데서 감당하게 하시고, 바벨론, 이집트 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그리고 숨겨졌던 아메리카까지도 주관해 오셨던 분이심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까아만 밤하늘의 대우주를 넘어서, 지금도 빛을 이름없이 발하고 있는 그 별을 조성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천국만 아니라, 지옥도 통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선과 빛만이 아니라 악과 재앙까지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화초는 울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자신의 무식과 교만에 대해서 치를 떨며 탄식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그 탄식과 회개가운데서, 조금씩 환하게 비쳐오는 빛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인식의 지평이 새롭게 전개되는 것 같았습니다. 역사의 새로운 새벽이 동터오는 것이었습니다.

 

 

 

 

 

잡초와 화초(4)-화초들의 고토귀환(I)

 

 

 어떤 형제가 저의 홈피 사랑방에 ‘누가 신이 죽었다 하는가?’하는 류의 글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현대인들 가운데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회복되고 있는 영적 기류에 대해서 지적한 글이었습니다. 이것은 요즘 사회학자들이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적인 차원에 대해서 둔감합니다. 이런 회복(?)의 기류를 잘못 이해하면, 그 가운데 흐르고 있는 영적 메시지를 놓쳐버리기 쉽습니다. 그 영적 메시지는, ‘오히려 초라한 화초들의 고토귀환’이라는 것입니다.

 

 고레스의 영에 의해서 이스라엘사람들이 바벨론 유수의 복역을 마치고 되돌아 온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스룹바벨을 진두로 해서 세워둔 성전과 그 이전 영광을 회상하면서, 그들은 오히려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럼 울음 속에는 도래할 메시야에 대한 희망이 뒤섞인 탄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잡초들의 번성에 숨이 막힌 화초들의 자기반성과 영적 자각을 통하여 인식하게 된 새로운 현대의 영적 상황을 반영해주기도 합니다. 이전에 절대적인 진리를 자기들만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그 자부심으로 잡초들을 학대하고 무시하고 깔아 뭉개어 버렸더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화초들의 그 ‘절대적 진리’라는 것 속에 계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절대적 진리’는, 모든 초목들(화초나 잡초를 모두 포함)의 인식의 한계 저편에 계시기 때문에, 화초들에게만, 소유당하여 질 것도 아니었더랬습니다. 잡초들의 선지자들이 이것을 고발하고 폭로했습니다. 그들이 오히려 진리의 일면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잡초들(의 선지자들)의 문제점은, 그 논리를 ‘절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하는 논리를 참으로 절대화시키게 되면, 자신들의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그 논리 조차도 상대적이어야 합니다. 그들의 논리는 자기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절대적 진리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더 나아가서 절대적 진리는 없다(신은 죽었다, 저자는 죽었다 등)고 선포한 것 또한, 잡초들의 지나친 자기교만(hybris!)였습니다.

 

이제 화초들은 겸손해 졌습니다. 자기들의 ‘절대적인 진리’를 ‘절대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고 소유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리가 거세되어지고, 길들여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의 인식의 한계에 있습니다. 이 인식의 한계가 더욱 절박한 것이 된 것은, 인생(화초든 잡초든)이 피조되었다는 상황 뿐만 아니라, 그 피조된 인생이 죄 가운데 떨어졌다는 타락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조차도 해석학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데리다의 주장), 그 해석학은 타락으로 인하여 더욱 왜곡되고, 변질되어서, 자기중심의 해석만을 조장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타락은 이브가 아담에게 나무를 가리키면서 ‘tree’라고 했을 때 그 말을 ‘three’라고 해석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에게 주는 과일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선물’로서 곡해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화초들이 겸손해졌다는 것은, 그런 곡해의 과정과 본질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식이라는 것이, 어떤 가치중립적인 객관적 프로세스가 아니라, 그 인식자의 인격과 가치가 개입되는 프로세스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머리(과학)와 가슴(예술)이 뗄래야 될 수 없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종교)란 그런 유기체인 것입니다. 마음과 목숨, 힘과 뜻을 “다해야”만 파악되고 또한 실천할 힘과 동기를 얻게 되는 것이 바로 진리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진리를 이해한다 함은 오히려 진리에 의해서 이해당하는 것이고, 진리에 의해서 해석당하고, 진리에 의해서 노출되고, 진리에 의해서 오히려 폭로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것 없이는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안다고 해서,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교만해진다면, 그것만으로 아직 진리를 알아야 할 만큼 알 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진리를 파악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의해서 파악됨으로서 이르게 되는 진리에의 확신-“겸손한 확신”입니다. 화초들은 이 겸손한 확신, 그러면서도 뜨거운 확신에 이르러, 이전 영광을 회상하며, 부끄러움과 소망이 뒤범벅이 되어서 우는 것입니다

 

 

 

 

잡초와 화초(5)-화초들의 고토귀환(2)

 

 

불확실한 시대 가운데서도, 확신에 이를 수 있되, 그 확신은 “절대적 확신”이 아니라, “겸손한 확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확신이 확신이려면, 절대적 확신이어야 한다는 것은, 바벨론유수 이전의 화초들의 사고방식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확신이 확신이되, 절대적 확신이 아니면서도, 이를 수 있는 확신, 바로 ‘겸손한 확신’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바벨론유수의 경험을 통하여, 화초들이 뼈저리게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초들 자신들이 생각하는 “절대적 진리”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그 “절대”의 한계까지도 넘어서 계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절대적 진리”조차도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진리를 넘어서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에 의해서 만나진 바 되고, 해석된 바 되어지고, 파악된 바 되어졌다는 확신, 이것이 바로 “겸손한 확신”을 가능케 하는 인식의 틀이 되었습니다. 결코 “거세된 진리”도, “길들여진 진리”도 아닙니다. 화초가 화초인 것은, 거세되고, 길들여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잡초가 잡초인 것이 그 반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화초와 잡초 사이에 있는 그 경계의 선이 애매모호한 언어의 “게임규칙”이 적용되어야만 설명되겠지만, 그 애매모호함 조차도, “규칙”인 셈입니다(뭐 이렇게 어려운 얘길?).

 

이제, 고토로 돌아온 화초들은 새로운 세계가 자신들 앞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새로운 인식의 지평선이 저 멀리 보입니다. “화초”와 “잡초”의 구분이 더욱 애매모호하면서도, 서로간에 그 기능과 역할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존재의 목적과 이유란, 화초 자신을 위해서, 잡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화초는 잡초를 위해서, 잡초는 화초를 위해서, 그리고 서로는 잡초와 화초를 존재케 하신 바로 그 분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서,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 가운데서 살아가는 세상, 바로 “Zion”의 이상과 꿈이 그 지평선 상에 떠오른 것을 바라봅니다. ‘메트릭스’의 ‘Zion’은 이 성경의 비젼으로서의 Zion과 비교하면, 너무 저급합니다. 너무 센슈얼하고, 너무 경쟁적입니다. 아직도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짜 Zion입니다.

 

 

잡초 안에 얼마나 많은 세포핵이, 그 세포핵 속에 얼마나 많은 양성자, 전자와 중성자가 존재하는 지 아십니까? 잡초가 얼마나 많은 우주의 신비들을 담지하고 있는 지 아십니까?저 넓은 광활한 대우주의 신비만큼이나 오묘하고, 심오한 진리들이 바로 길거리에 이리저리 채이는, 잡초 안에 담겨져 있는 것을 아십니까? 일종의 소우주지요. 바로 그 소우주는 대우주로 통하는 접촉점입니다. 바로 당신 옆에 있는, 당신이 잡초라고 여기는 형제나 자매는 바로 당신이 그렇게 찾고 있는 바로 그 분의 형상입니다. 바로 그 분, 절대를 넘어서는 바로 그 분이 바로 당신 옆에 있는 “잡초”를 통해서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1요4:12). 이 대우주는 일종의 “원소”나 “입자”로 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파동”으로 되어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주는, “존재”이면서 또한 “과정”입니다. 존재만도 아니고, 과정만도 아닙니다. 입자이면서 파동이고, 파동이면서 입자입니다. 도덕론적 판단으로서가 아니라, 인식론적 측면에서라면, “색증시공, 공즉시색”이랄 수 있습니다. 그 신비 앞에 우리는 잠잠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겸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모지사바하”론 그 분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잠잠히 그 분의 구원을 지켜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오히려 내가 그 분의 손에 붙잡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그 분의 아시는 바가 될 때, 내가 진정 그 분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이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나의 모든 신경세포 속에, 나의 혈액 속의 적혈구, 백혈구로도 계시면서, 나의 모든 것을 뛰어넘어 계시는 분,

나의 지각과 인식과 존재의 모든 한계들을 넘어서서 계시는 바로 그 분에게 사로잡힌 바 되셨나요?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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