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진보와 보수의 결정적 구분은 '성서해석'

by 김균 posted Aug 04, 201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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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진보와 보수의 결정적 구분은 '성서해석'

 

언젠가 어떤 분이 나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자꾸 보수와 진보 운운하는데, 기독교에서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 있는

그 결정적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개인구원과 정치 사회적 구원의 유무?

에반겔리즘이냐? 에큐메니즘이냐?

혹은 기독교배타주의냐? 종교다원주의냐?

한국 기독교의 야사에는 이에 대한 답변을 가늠케 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언젠가 국내 진보 진영의 학자들이 보수 진영의 학자들에게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서 허심탄회하게 한국 기독교를 위한

대토론회를 크게 열자고 제의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보수 진영의 학자들은 처음에 거절했다.

그러자 진보 측은 다시 제의하길, 그렇다면 그냥 비공식적이라도

한 번 모여보자고 제의하자 보수 측이 이를 수락했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양 진영의 신학자들이 지리산에서 숙식을 하면서

한국 기독교의 일치를 위한 허심탄회한 토론 자리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여전히 보수와 진보의 화합으로 이어지지 못했었는데,

그렇게 서로 합의되지 못했던 그 결정적 지점은 개인주의니 사회변혁이니

에반겔리즘이니 에큐메니즘이니 배타주의니 종교다원주의니 하는 그런 지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성경해석 즉, 성서비평의 유무에서 서로 첨예하게 갈라졌다고 하였다.

참고로 이 에피소드의 출처는 그때 계셨던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바다.

 

'성경적'이라는 표현의 함정

 

성경해석에 대해 본격적으로 거론하기에 앞서 두 가지 사항만 짚고 넘어가자.

첫째는 '성경적'이라는 말에 대해서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성경적'이라는 표현을 무지하게 잘 쓴다.

이러한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일반 신자든 목사든 누구든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무엇을 하든 성경적으로 하라고 말한다.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복음적' 혹은 '기독교적'이라는 말의 쓰임과도 흡사하게

기독교인으로서 지향해야 할 최상의 지점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똑같은 성경책 한 권을 두고서도 저마다

그 해석을 다르게 한다는 점이다.

어떤 때는 한 구절을 놓고도 그 해석이 서로 첨예하게 갈라진다.

심지어 같은 구절을 두고 번역본도 저마다 다르다.

킹제임스역본, NIV, RSV, 개역, 공동번역, 새번역 등 헤아릴 수 없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나는 히브리어, 헬라어 원문을 보길 권하며,

여의치 못할 경우 많은 번역들과 서로 대조해보면서 뜻을 찾아가길 권한다.

 

'성경적'이라고 하는 말의 함정에 대해 예를 들어보겠다.

성경이 쓰인 여성에 대한 입장이 그러하다.

현재 추세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점점 줄어들고 상호평등을 지지하는 교단이

늘어가긴 하지만,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진영도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

실제로 성경 본문을 찾아보면 여성에 대한 비하가 허다하다

(본 연재물의 '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7)' 글 참조.

믿기지 않는다면 직접 성경을 찾아보면서 대조해봐도 좋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이 말이다.

 

최근 시끌벅적대고 있는 '사형제 논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보수 기독교 단체인 한기총은 사형제를 지지하는 이유가

성경적으로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사형제를 반대하는 진보 진영 역시 성경을 얘기하지만

한기총과는 전혀 다르게 성경을 독해해낸다.

그 내용을 일일이 여기서 나열하진 않겠다. 이런 현상은 비단 오늘날의 경우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노예제를 정당화했던 그 근거 역시 성경에 기인한다.

반대로 노예제 반대 역시 성경에 기인하고 있다.

노예제 때문에 창세기 9장의 함의 저주 본문과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이

서로 부딪히기도 한다(<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살림) 참조).

같은 성경끼리 부딪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철폐가 성경적으로 옳은가? 아니면 존속유지가 성경적으로 옳은가?

 

나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성경은 때로 사람을 살리기도 했지만

무수하게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물론 성경을 그릇되게 해석한 자가 사람을 죽였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뜻하는가.

즉 성경은 결국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죽임의 책'이 되기도 하고

'살림의 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성경은 무섭고도 끔찍한 책이었던 적도 많았었다.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하나마나한 말

 

그렇기에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하나마나 한 표현이며,

별로 쓸모도 없는 비생산적인 표현일 뿐이다.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그냥 가장 옳고 타당한 것이라는 의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쓰는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표현은

'가장 옳고 타당해야 한다'는 말의 동의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으로 돌아가라' '성경에 기반하라' 등 이런 얘기들도 마찬가지로

죄다 하나마나한 말이며, 그저 '뜻에 맞게 잘해보라'는 뜻의 동의반복일 뿐이다.

실제로 우리에겐 저마다의 다양한 성서해석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상 가장 중요한 것은 해석상의 문제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가장 좋은 것인가?

 

성경의 숱한 오류와 불일치들(직접 성경을 찾아볼 것!)

 

중요한 점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두 번째는 성경에는 오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다.

대다수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쓰인 오류를 모르거나

알아도 애써 인정치 않으려 한다.

이때 성서는 완전무오하다고 주장하면서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자들이

곧잘 써먹는 레퍼토리 구절 중의 하나는 특히 디모데후서 316절을 언급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그런 식의 대응은 도무지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처사다.

도대체 자기 주장의 근거를 자기 주장에 둬버리는 처사가 어디 있는가?

게다가 디모데후서의 그 구절이 가리킨 성경이란 것도 본래는

당시의 구약의 경전을 말한 것이었지

디모데후서를 포함한 신약성서는 포함되지도 않았던 것을.

 

하지만 이런 저런 얘기할 것도 없이 기계적 영감설이든 유기적 영감설이든,

나 자신이 여기서 성경의 오류들을 직접 찾아서 보여주면 될 것으로 본다.

감히 말하지만, 성경에서 오류들을 찾아내는 것은 정말 '식은 죽 먹기'보다도 더 쉽다.

일단 앞서 말한 '성차별 전서'에서 추려낸 신구약 구절들만 봐도

그러한 오류의 사례들이 한 둘이 아님을 알 것이다.

 

예컨대 전도서 기자는 남녀를 비교하면서

"해답을 찾는 남자는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지만

여자들 가운데는 하나도 없다"(7:28)라고 말하고 있다.

명백하게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고 있는 성차별적 구절이다.

버젓이 하나님의 말씀인 양 담겨 있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한다.

이런 성차별적인 성경구절들은 성경 곳곳에 참 많다.

 

그럴 경우, 성경이 완전무오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성차별적 인식과 태도는 매우 성경적이며 자연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여성을 비하하는 예장 합동측 목사의 기저귀 발언이

그저 나온 얘기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물론 성경에는 여성에 대한 오류 사례만 있지 않다.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모를 지경일 정도로 말이다.(퍼온글)

 

퍼온글은 참고만 하시라는 말입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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